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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새 성장동력, 제도·정책 등 비경제 측면서 찾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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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호 12면

최정동 기자

올해는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다. 1인당 국민소득 300달러의 세계 최빈국 신생 독립국가는 70년 만에 3만 달러를 바라보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한때 미군 초콜릿을 구걸했던 ‘받는 나라’가 이젠 한 해에 1조4540억원(2016년 계획)의 해외 무상원조를 하는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것이다. 분단과 6·25전쟁 등 숱한 시련과 격변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이뤄 낸 유례없는 성취다. 대한민국은 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와 70년대 박정희의 경제 발전을 토대로, 80년대 분출하는 민주화의 요구와 90년대 세계화의 파고를 잘 헤쳐 왔다.

광복 70년 세미나 연 임현진 사회과학협의회장

그러나 21세기 들어 험난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양극화 심화로 중산층의 삶이 흔들리고 있으며, 특히 지난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사회 전반에 불안과 불신이 커지고 있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지난달 17일 ‘광복 70주년 대한민국 7대 과제:21세기 일류국가로 가기 위한 정책 제언’ 세미나를 연 한국사회과학협의회 임현진(서울대 명예교수) 회장에게 물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위기의식이 팽배하다.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미국은 여전한 흑백 갈등, 유럽 역시 타 종교, 타 인종를 얕잡아보는 백인 우월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급진 정도가 아니라 일탈에 불과한 이슬람국가(IS)가 힘을 얻는 이유다. 세계화가 부의 총량을 늘렸을지는 몰라도 양극화 문제를 초래했다. 과거 파이는 작았을지언정 불평등은 덜했는데 이제 불평등에 따른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국도 비슷한 맥락인가.
“같으면서도 다르다. 20세기 초 남들이 비행기를 만들 때 자전거도 제대로 못 만들던 나라다. 지금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선박·자동차를 만들고 산업화와 정보화 시대에 중요한 철강과 반도체 강국이 됐다. 무역 규모로는 세계 10~15위권이지만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가 채 안 된다. 브라질·인도네시아·인도·남아프리카공화국·말레이시아 같은 신흥국이 지금보다 더 성장하면 2%로 떨어진다. 이대로 계속 가다간 중진국 함정에 빠진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돌파(95년)한 지 12년 만에 2만 달러를 넘었다. 그나마도 글로벌 금융위기로 주저앉았다가 2010년에야 다시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지만 아직 3만 달러는 넘지 못했다. 일본은 2만 달러(88년)에서 3만 달러(92년)까지 4년밖에 안 걸렸다. 새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 정부의 제도나 정책 같은 비경제적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제도·정책 변화가 성장동력이 될 수 있나.
“그렇다. 성완종 사태는 여야 모두 한국의 부패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보여 준다. 제도와 정책이 투명하지 않은 탓이다. 많은 분야에서 여전히 제도가 허약하다. 일주일이면 충분할 투자 승인 결정에 두석 달이 걸리고 외국인의 취업비자 발급도 굉장히 까다로워 인재와 자본을 끌어오는 데 장벽이 높다. 93년 도입한 금융실명제를 보자. 실명제 자체는 투명하지만 여전히 차명도 있고 도명도 있다. 형식적인 제도는 갖췄을지 몰라도 실질적인 면에서 아직 많이 부족하다. 안전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민안전처가 생기긴 했지만 관련 법률과 제도가 부처별로 흩어져 있어 효율성이 떨어진다. 가스 안전은 산업통상자원부, 수재는 행정자치부 식이다. 물론 제도 도입만이 능사가 아니라 국민 의식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 성완종 사태가 벌어질 수 있는 건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정경 유착이 가능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제도와 현실의 간극이 있는 또 다른 예는.
“민주주의를 예로 들어 보자. 절차적 민주주의는 오래전 도입됐고 이미 두 번의 정권 교체까지 이뤄 냈다. 그런데 왜 여기서 더 이상 못 나가는 걸까. 정치 영역에서는 제도로써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지만 그 외 영역, 즉 가정·학교·회사 등에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과거식 권위주의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최근 불거진 ‘갑질’ 논란은 생활 영역에서도 민주주의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땅콩 회항’을 불러온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보여 준 인격 모독적인 행태는 과거에도 있었다. 달라진 건 힘없는 아랫사람이 그저 당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비정치 생활 영역에서의 민주화가 진행 중인 거다. 이게 반드시 옳으냐는 다른 문제다. 갑이 나쁜 게 아니다. 갑질이 나쁜 것이지. 갑에도 얼마든지 ‘갑격’이 있을 수 있다. 높은 지위라도 얼마든지 아랫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할 수 있다. 그걸 토대로 서로 존경심을 갖고 대하는 건 필요하다. 얼마 전 하노이의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학생들이 엘리베이터를 양보하고 인사하더라. 서울대에선 이제 그런 걸 찾아볼 수 없다. 민주주의 한다고 ‘경어법 없는 민주주의’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시 정치가 제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건 아닌가.
“권력은 정치뿐 아니라 문화·언론·기업 등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유독 정치에 책임을 많이 묻는 건 정치가 사실상 권력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 때만 되면 기업이 정치인 눈치를 본다. 다른 분야가 정치를 견제해야 하는데 현실은 정치가 다른 분야를 억누르고 독점한다. 일부는 이런 이유로 권력분산형 내각제 도입을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처럼 직업관료의 전문성이 전제되거나 영국 왕처럼 상징적인 존재가 있을 때나 성공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권력 나눠 먹기로 갈 것이다.”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지난 70년 한국은 놀라운 성취를 했다. 이유가 뭘까.
“노동자·근로자가 고생했고, 관료가 특정 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정책을 중립적으로 만들었다. 부모는 높은 교육열로 자식을 교육시켰다. 부모세대의 희생이 있었다는 얘기다. 상승 이동의 욕구를 자식 교육을 통해 실현했다. 땅 팔아가며 무리해 대학에 보낸 이유다. 그렇게 고생해 교육시키느라 남은 재산도 없는데 정작 자식은 그걸 몰라 준다. 노년층이 절망하는 이유다.”

-절망하는 노년층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복지가 중요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몇십 년 전만 해도 지금 이맘땐 굶어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62년 울산에 산업공단을 만들 때 울산 하늘을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로 채우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같으면 욕먹을 소리지만 당시엔 박수를 받았다. 배고픈 시절이었으니까.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제약회사 바이엘 본사가 있는 독일 레버쿠젠에 간 적이 있다. 그 사람들 얘기가 독일도 1인당 국민소득 8000달러 시절까지는 폐수를 몰래 내다 버렸다고 한다. 먹고살 만해지면 자유, 그리고 뒤이어 평등 욕구가 분출된다. 이런 이상을 모두 통합하는 가치가 복지다. 못사는 사람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게 아니라 희망을 주는 게 복지다. 특히 세계화 이후 빚어진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취약계층에 대한 보호장치가 꼭 필요하다. 정치권은 거대담론으로 보편적 복지냐, 선별적 복지냐를 말한다. 복지가 실제 정책으로 이어졌어야 하는데 정치인들이 정책화 대신 정략화를 해 버렸다. 박근혜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는 무지한 얘기다. 한국의 복지 지출 증가율(1990~2009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5.38%)을 훨씬 뛰어넘는 15.96%였다. 결국 중부담으로 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떻게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느냐다. 북유럽처럼 아무리 적게 벌더라도 조금이라도 내고, 많이 벌면 많이 내는 국민 개세주의로 조세체계를 바꿔야 한다.”



임현진 1949년 서울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하버드대 사회학 박사. 83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부임 후 사회과학대학장 등 역임. 현재 한국사회과학협의회 회장이자 서울대 명예교수, 경실련 공동 대표.

안혜리 기자 기자 ahn.hai-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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