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의『맹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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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 세계가 인간다운 삶을 허용하지 않는 인간 파괴적 세계라는 인식은 오늘날 많은 시인들에게 공통적인 세계인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 안식의 공통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저마다 시적 태도를 달리한다. 그것은 거칠게 말하면 그 공통성이란 지극히 피상적인 것일 뿐이고 실제에 있어서 그 세계 인식의 구체적 내용이 저마다 같지 않으며, 나아가서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문학적 대응 방식이 서로 다른 데서 비롯된다.
그 다양한 시적 태도들 중에서 김정환의 시적 태도는 주목되어야할 80년대의 귀중한 가능성중 하나다. 김정환은 생성·변화·발전의 개념으로 이 세계를 파악함으로써 현실에의 순응·타협·화해를 거부하는 한편 이 세계에서의 삶을 단순히 수동적 고통으로 규정하지 않고 능동적인 <살아냄> 으로 파악함으로써 어떠한 형태의 피안으로의 현실도피도 거부한다.
김정환에게 있어 세계는 변혁되어야 하며 변혁될 수 있는 세계이고, 김정환의 시는 세계변혁의 전망을 획득하기 위한 실천에 다름 아니다. 그 전망은 그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획득을 위한 실천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김정환은 깊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근작『맹서』(『외국문학』1984년 여름호)는 그러한 시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을 산문적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지금 잠들어 있는데, 잠든 내 머리맡에서 깨어나라고<누가 내 정수리에 못질을 해대고 있>고, 그래서 나는 <깜깜한 고요 속에서 두눈이, 두팔이, 두다리가, 가슴이 떨>린다.
여기서<잠>의 의미가 생물학적 잠이 아니라 실천적 삶으로부터의 후퇴임은 명백하다. (생물학적으로는<나>는 지금 불면으로 괴로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생물학적 불면의 괴로움이 실천적 삶으로의 결단과 투신에 대한 요구로 변용되고 있는데에서, 이 작품은 불면을 소재로한 많은 다른 시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 비생물학적 잠에서 깨어나라고 촉구하는 주체는 <피투성이 희망>이다.

<피투성이 희망>이<내 머리맡을 맴돌고 있>고 <피투성인 채로 나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단 (시제로 쓰인 표현으로는<맹서>)에 이른다.

<잠깨어 돌아가자 잠깨어 안되면 몸이라도 팔자 거름이라도 되자 절망은 아무변명도 되지 못한다>

<절망은 아무 변명도 되지 못한다>는 진술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고 절실함을 얻는 것은, <피투성이 희망>이라는 이미지의 창출이 그 앞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김정환에게 희망은 피투성이다. 희망은 그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부딪치며 깨지며 피흘리며 형성해 가는 것이라는 의미 내용을 그 이미지는 갖는다.
이<피투성이 희망>의 논리가 김정환의 시적 작업의 원동력이다. 그 논리가 이를테면 장편연작시집『황색예수전·2』(84년 5월, 실천문학사간)에서의 시도들-장편연작시라는 양식상의 시도, 시의 노래성 획득의 시도 등-을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손쉽게 포기해 버리지 않도록 해주며 현실 변혁의 주체로서의 자기정립-즉 민중과의 진정한 연대-을 향해 힘차게 밀고 나가도록 해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객관적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자기 기만적 허위로 추락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험은 비판과 극복의 대상일뿐, 작업 자체의 의미를 부정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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