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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책자랑질은 무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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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지난 23일은 세계 책의 날. 공교롭게도 이날은 인천지법 젊은 판사들과 함께하는 책 수다 모임 ‘북홀릭(bookholic)’ 날이기도 했다. 주축은 아이 키우랴 야근하랴 쉴 틈이 없는 30대 워킹맘 판사들이다. 매달 하루라도 온전한 자기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절실함이 만든 모임이다. 책을 한 권씩 정해 읽은 후 점심을 먹으며 편하게 수다를 떤다. 봄꽃이 예쁜 날 도시락을 싸들고 인근 대학 교정에 가서 모임을 하기도 했다.

 첫 모임 때 읽은 책은 중국 사회의 단면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가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였다. 어렵고 대단한 책을 고집하지 않았다. 일에 치여 사는 워킹맘 판사들은 『꾸뻬씨의 행복여행』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엄마로 산다는 것』에 열광했다. 연말 모임 때는 좋아하는 시 한 편씩을 준비해 와서 서로에게 읽어주었다. 나는 장정일의 ‘삼중당 문고’를 골랐다. 삶의 모든 순간을 함께해온 책에 대한 애절한 연애시다.

 요즘 젊은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며 훈계하는 이들이 많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의 행동양식을 모방하는 속성이 강하다. 식자들의 한탄은 오히려 청년들로 하여금 남들도 책을 안 읽는다고 인식시켜 서점에서 쫓아내고 있을 뿐이다. 효과적인 독서장려법은 책이 매력경쟁에서 유리한 도구이고, 알고 보면 남들은 이미 책을 즐겨 읽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다. 사실이 그렇다. 내 고교 친구 및 후배인 방송인 셋에게 최근 읽은 책이 있는지 물었다. 공형진은 배우답게 영화 이상으로 스릴 있는 정유정의 『7년의 밤』을, 먹는 거 좋아하는 신동엽은 박찬일 셰프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를,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유희열은 섬세해서 좋다며 마스다 미리의 만화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를 꼽더라.

 책은 평등하다. 가벼운 책이라도 읽어 버릇하면 독서근육이 탄탄해져 다양한 책을 즐길 수 있다. 책은 뉴 트렌드다. 모두 일제히 고개 숙이고 스마트폰 만지작거릴 때 홀로 우아하게 책장을 넘기면 뭔가 있어 보인다. 짐승남은 한물갔고 뇌가 섹시한 뇌섹남이 대세다. 책은 즐거운 놀이다. 스타, 아이돌부터 흔해 빠진 먹방 사진 대신 온갖 특이한 장소·상황에서 책을 폼 나게 읽는 척하는 허세 셀카를 올리는 놀이로 자신을 차별화하면 어떨까. 허세, 자부심, 멋을 뜻하는 힙합 용어 스웩을 활용해 ‘리더스 스웩(reader’s swag)’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디스패치는 자연스러운 청춘의 연애사만 캐지 말고 스타가 남몰래 아끼는 책도 특종 보도하고.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