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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매드맨 게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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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예측 불가능하고 마치 정신이상처럼 보이는 것은 서방을 속이려는 술책이다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세계 지도자들과 일반인의 마음에 자신이 늘 존재할 수 있도록 기발한 전략을 구사했다. 적을 혼란시키고 겁주기 위해 미친 체한 것이다. 최근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비슷한 전략을 채택한 듯하다. 우울해 보이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듯이 행동하거나 아예 잠적하기도 한다. 이상야릇한 성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 주재 대사를 역임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부터 푸틴을 알았던 한 외교관은 “예측 불가한 듯이 보이려고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국영 방송은 집단 정신병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푸틴을 돕고 있다. 푸틴을 예측 불가한 인물로 그려내 서방을 겁주려는 게 러시아의 전략이다. 핵무장한 나라에서 미치광이가 권력을 잡고 있다면 모두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 2년 동안 푸틴은 러시아의 핵병기고를 세계적인 공공 인식의 전면에 위치시키려고 애썼다. 미국과학자연맹(FAS)의 핵위기 전문가인 마틴 헬먼 스탠퍼드대학 명예교수에 따르면 서방은 푸틴의 핵전쟁 게임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핵무기는 푸틴이 가진 비장의 카드다. 그는 러시아가 지역 강대국이 아니라 세계적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려고 그 카드를 사용한다. 러시아는 서방을 1시간 안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고 겁주는 것이다.” 미치광이 게임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려면 서방은 푸틴의 그런 눈길 끄는 행위에 장단을 맞추지 않아야 한다고 헬먼 교수는 주장했다.

돌이켜 보면 그런 전술은 잘 먹혀 들었다. 카다피는 핵개발 프로그램으로 국제사회와 효과적으로 흥정할 수 있었다. 북한도 똑같은 전술을 사용한다. 실제로 핵 전략에선 어느 정도 미치광이로 인식되는 게 최고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밥 홀드먼 비서실장에게 “‘매드맨 이론’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말했다. “아무튼 내가 베트남전을 중지시키려고 무슨 짓이든 할지 모른다고 북베트남이 믿기를 바란다.” 미군 전략사령부는 1995년 기밀 보고서에서 이렇게 권고했다. “너무 완벽하게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보이면 오히려 불리하다. … 미국이 국가 이익을 공격당하면 비이성적이 되고 반드시 보복하려고 한다는 것이 우리가 모든 적에게 투사해야 할 국가적 모습이 돼야 한다.”

비이성적이고 보복심이 강하다는 것은 현재 블라디미르 푸틴의 모습과 빼닮은 듯하다. 그러니 외국 정부와 정보기관이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푸틴의 속내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수년 전 미국 국방부 산하 싱크탱크는 한 보고서에서 푸틴이 아스퍼거 증후군(자폐의 일종으로 얼굴 표정이나 몸짓 등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어려워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질환) 환자일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리분석 방면에선 CIA가 단연 최고다. CIA의 성격·정치적 행동 분석센터는 외교관들의 관찰 소견과 정보 보고부터 대상자의 연설과 태도 평가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외국 지도자 수십 명의 성격 프로필을 만든 적이 있다.

CIA는 지금도 그런 성격 평가서를 작성한다. 토드 에비츠 CIA 대변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전문 분석가들은 지금도 정책 입안자들에게 외국 지도자들에 관한 예리한 분석 자료를 제공하지만 요즘은 그들이 CIA의 정보본부 각 부서에 배속돼 정치, 군사, 경제 문제를 다루는 분석가들과 통합적으로 일한다.”

합리적인 소시오패스

그렇다면 CIA 심리 분석가들은 현재 블라디미르 푸틴을 어떻게 평가할까? CIA는 절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CIA 성격·정치적 행동 분석센터를 설립해 수년 동안 이끈 조지워싱턴대학 제롤드 포스트 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푸틴은 자신을 러시아어 사용자 전부를 책임지는 현대판 차르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러시아인이 아니라 자신이다.”

푸틴의 강철 같은 외면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약자로 괴롭힘을 당한 결과라고 포스트 교수는 주장했다. “그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고 유도를 배웠다. 그의 리더십에서도 똑같은 행동양상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지금 세계적인 지도자가 된 그에겐 핵탄두가 학창 시절 괴롭힘당하던 그의 유도 기술에 해당하는 셈이다.

러시아에 10년 이상 투자했던 영국인(미국인에서 귀화했다) 투자자 빌 브라우더는 완전히 객관적인 푸틴 관측자라곤 말할 수 없다. 그는 러시아에서 추방됐고 그를 위해 일하던 강직한 러시아인 변호사도 감옥에서 의문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푸틴의 집권 초기부터 그를 잘 알았다. 브라우더는 푸틴을 “아주 합리적인 소시오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자)”로 부른다.

우크라이나에서 빅토르 야뉴코비치 대통령이 마이단 시위로 쫓겨날 때까지는 푸틴이 스스로 러시아 국내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나 야누코비치의 몰락을 보면서 자신도 위태로울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러시아 국민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성난 시위대 앞에서 무력했던 야누코비치의 모습에서 푸틴은 자신의 옛날 모습을 봤다. 1989년 가을 동독의 민주화 시위대가 드레스덴의 KGB 사무실 진입을 시도했을 때 그는 소수의 경비원만 데리고 그들을 막아야 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되면 대부분 서민과 접촉하지 않아 거리 물정에 어둡다. 과거 푸틴의 친구였던 한 인사는 “그런 지위에 오르면 누구든 마음이 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푸틴은 KGB 출신이기 때문에 좀 색다르다. 오래 정권을 잡은 다른 지도자들은 정상적인 방향으로 심리가 변하지만 푸틴의 경우는 KGB 방식으로 변한다. 그에겐 KGB 네트워크만 믿을 뿐 다른 모두는 적이다. 편집증 환자처럼 피해망상에 시달린다.”

그런 편집증이 미치광이 게임을 부채질한다. “한편으론 푸틴을 정신이상자라고 말하긴 쉽다. 실제로 그 때문에 우리는 지금 핵전쟁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2~3년 전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의 행동은 전혀 미친 짓이 아니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핵무기 카드를 꺼내는 것은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한 가지 수단이다. 그에겐 효과적이지만 러시아엔 정신 나간 전략이다.” 그런 자아도취적 성향은 오래 전부터 나타났다. 드레스덴의 KGB 사무실에 침투한 서독 스파이는 푸틴의 아내 류드밀라와 친해졌다. 류드밀라는 그에게 남편(푸틴)이 자신을 구타할 뿐 아니라 구제불능의 플레이보이라고 털어놓았다.

자아도취형 지도자

푸틴과 사담 후세인 같은 독재적 지도자가 성격 분석 대상으로 가장 적합하다. 그런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가 위기에 직면하면 외부에서 그 국가를 대할 때 성격 분석이 매우 중요하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메나헴 베긴 전 이스라엘 총리와 안와르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성격을 분석한 CIA 프로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 분석에 따르면 베긴은 사소한 세부사항까지 챙기기를 좋아한 반면 사다트는 대범한 행동을 선호했고 ‘노벨상 콤플렉스’까지 있었다.

그러나 푸틴이 핵 버튼을 누르기로 결심한다면 아무리 정교한 심리분석도 무용지물이다. 그 보복으로 미국이 핵미사일을 쏘아 러시아 도시들을 초토화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사람과의 공감에 문제가 있는 자아도취형 지도자는 그런 문제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헬먼 교수는 “미국이 세계 유일의 재래식 무기 초강대국이지만 푸틴은 미국에 밀리는 굴욕을 핵무기로 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브라우더에 따르면 푸틴은 모욕이나 비판에 아주 민감해 절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 헬먼 교수는 서방이 러시아를 대할 땐 원만한 결혼생활을 위한 조언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실수를 먼저 인정해 상대방이 실수를 인정하기가 더 쉽도록 하라는 것이다.

다른 해결책은 푸틴이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브라우더는 그가 2000억 달러 정도의 재산을 모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 돈으로 쾌적한 은퇴생활을 즐기면 된다. 과거엔 동정심 있는 나라가 밀려난 독재자들을 받아들였다. 우간다의 이디 아민 전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튀니지의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전 대통령도 그랬다. 팔라비 전 이란 국왕은 달가워하지 않는 나라들을 전전하다가 결국 멕시코에 정착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은 마지막 나날을 하와이에서 보냈다.

하지만 어떤 지도자가 블라디미르 푸틴을 받아들일까? 권좌에 머물려는 그의 집요한 노력이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미치광이 전략은 전적으로 합리적이다.

ELISABETH BRAW NEWSWEEK 기자,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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