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018) 제80화 한일회담(217) 일본의 속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한일문제는 63년 상반기 내내 부심하는 국내정세 때문에 소강상태를 유지할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의장은 2·18성명을 통해 민정이양과 자신의 민정 불참을 선언했으나 3월16일에는「군정연장」의 폭탄선언을 해 국내외를 놀라게 했고 다시 4월8일에는 이를 철회하는성명을 내는 등「번의」를 거듭했다.
이런 한국 정정을 일본은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오오히라」외상이 의회에서『한국정부와 한일회담을 계속해 나갈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며 회담의 무기연기 가능성을 시사한 것도 이때쯤의 일이다.
하지만 일본의 속셈은 김-「오오히라」회담이 있기 전부터 그들이 추구해온대로「가급적 현 군사정부와 회담을 타결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국민의 여론이 첨예한 반응을 보이는 평화선 문제같은 것은 민정이양 후의 민간정부보다 국회가 없는 군사정부와 해치워버리는 것이 유리하다는게 일본의 판단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6월초 소집된 한일 예비회담에서 일본은 청구권 규모에 포함돼 있는 1억달러의 민간차관을 국교정상화 이전에 제공할 의사를 비치는가 하면 중단상태의 어업회담 재개를 우리측에 촉구해 오기도 했다.
어업회담은 사실 우리로서는 벌써 응했어야 할 양국간의 외교적 약속이었고 이에따라 평화선 문제를 다루기 위한 어업 전문위가 7월2일 소집되었다. 이자리에서 우리측은 최초이자 공식으로 평화선 철폐안을 제시하는 대신 어족보호를 위한 40해리 전관수역안을 내놓았다.이에대해 일본은 즉각『한국의 40해리 전관수역 제의는 국제관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반발,「12해리 전관수역」안을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양국 정부는 평화선 문제를 포함한 한일관계 전반 문제들의 활로를 모색키 위해 정부차원의 공식교섭을 시도했다.
이해 7월26일 당시 김용식무임소장관과「오오히라」외상간의 각료회담이 열린 것이다. 이 회담에는 우리측에서 당시 최규하외무부대사와 배의환수석대표가, 일본측에서「시마」(도)외무차관과「우시로꾸」(후궁) 아주국장이 참석했다.
일본측은 대뜸 평화선 문제를 제기해왔다.「오오히라」외상은 일본측의 기본안으로 전관수역 12해리, 보호수역 28해리안을 내놓았다.
우리는 대신 어업자금 공여문제를 들고 나갔다. 회담은 평화선 문제에 대한 즉각적인 타결보다는 서로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하느라고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다.
우리의「어업협력자금」요구에 대해 일본은『우선 수역문제부터 매듭짓자』고 나왔다.
두차례에 걸친 회담은 결국 어업협력자금을 위한 차관액을 일본측이 제시하지 않아 탐색으로 시종한채 끝났다. 하지만 이 회담에서 양측은 평화선 문제에 대한 서로의 복심을 드러내 앞으로의 해결방향을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다. 즉, 평화선에 대체할「수역」으로 전관수역과 공동규제수역을 정하고 한국의 낙후된 어업을 살리기 위해 어업차관을 일본이 제공한다는 기본 윤곽이 정해진 것이다.
이해 10월에는 마침내 제3공화국이 탄생된다. 공화당총재로 출마한 박정희후보가 재야 단일후보로 옹립된 윤보선후보를 15만표란 아슬아슬한 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이어 12월에는 6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돼 혁명주체 세력들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공화당이 집권 여당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파란곡절 끝에 태어난 민간정부였다. 그로부터 국교정상화까지 한일회담은 가장 신랄하고 완강한 국내적 시련과 저항에 봉착하게 된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