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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문화

폐허, 그리고 비밀의 식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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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쓰린 가슴을 다독이며 화분을 정리하다 보니 한구석에 보드라운 것이 잡힌다. 이끼들…. 그걸 보는 순간 서늘한 탄식과 함께 이상한 감동이 밀려온다. '아롱이'가 썩으면서 남긴 수분과 양분을 밑천 삼아 화분 안쪽에서 또 다른 생명들이 삶터를 꾸리고 있었던 것. 이끼들에서 묘한 '아롱이'의 흔적을 느끼며 그들의 평화를 위해 도로 흙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수줍은 이끼의 생태를 보며 폐허에서 제일 먼저 생명력의 표지를 해주는 보잘 것 없는 은화(隱花)식물의 존재감이 새삼 샘물처럼 느껴진다. 은화식물. 말 그대로 민꽃식물이니 양치류.선태류.균류 등을 이르는 말이다. 물론 지금 식물분류학에서는 은화식물이라는 대분류는 큰 의미도 없고 잘 쓰이지도 않는다지만, 학창 시절 선생님이 들려준 민꽃식물의 학명이 오늘 따라 오랜 기억 속에 먼지를 털고 어슴푸레 떠오른다.

18세기 스웨덴의 박물학자 C 린네가 붙인 크립토감(Cryptogam)이라는 라틴어 학명은 '비밀스러운(krypto) 식물(gam)'. 눈에 띄게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척박한 터에서 푸른빛을 띠는 이끼 융단은 말 그대로 '비밀의 정원'이 아닌가. 그렇게 이끼는 다른 것들이 차마 들어올 수 없는 생물 환경의 가장 최하층에서 그들을 다시 초대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숲에 가더라도 우듬지 위로만 눈길을 주며 햇빛 샤워를 하느라 발 아래를 유심히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나무 등걸을 무심코 툭툭 차며 그 한쪽 후미진 곳에서 명이 다한 것들의 잔해 위에서 다시 숨을 쉬는 은화식물들을 짓이겼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무언가의 잔해는 요요(耀耀)히 드러나는 것들만이 존재가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우리의 조야한 시선에 빛을 주는 듯하다.

폐허와 소멸에 대한 흥미로운 예찬서인 미다스 데커스의 '시간의 이빨'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보았다. 이 책에 인용된 미국의 문화지리학자 J B 잭슨은 '폐허의 필요성'에서 "폐허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폐허 혹은 소멸의 필요성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모든 것이 성숙해진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한다고. 빅토리아 시대에는 꽃 한 송이 피우지 않고 폐허 속에서 번식하는 버섯이나 이끼를 순수한 소년소녀의 '동정(童貞)'과 연결시켜 관상용으로 키우기도 했단다.

생명의 아름다움을 두 배로 알게 해준 '아롱이'의 이끼들. '아롱이' 하나를 더 사고 싶다. 그 위에 이끼들도 얹어 잘 키워야겠다. 물론 물은 듬뿍 줘야지. 지금 따뜻한 우유로 축인 나의 목도 한결 부드러워진 듯하다.

최효민 국악방송 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