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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38. 5회 아시안게임<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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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태극기와 ‘KOREA’를 카드섹션으로 연출하고 있는 관중의 환영 속에 한국선수단이 방콕아시안게임 주경기장에 입장하고 있다.

1966년 12월. 태국 수도 방콕은 불볕 더위로 타들어가는 듯했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면서 나는 정수리에 쏟아지는 태양의 에너지와 온몸을 휘감는 열기를 느꼈다. 제5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는 한국선수단을 이끌고 도착한 방콕. 내가 대규모 선수단을 이끌고 국제대회에 참가하기는 2년 전 도쿄올림픽에 이어 두 번째였다. 나는 방콕에서 짜릿한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쓰라림, 그리고 오직 승리에만 눈 먼 자들에 대한 혐오를 체험하게 된다. 대회는 9일부터 20일까지 열렸다.

내가 태릉선수촌 건설을 서두른 것은 방콕 대회에 조금이라도 일찍 대비하고 싶어서였다. 방콕 대회는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하기로 결정한 우리나라로선 체육 발전의 일대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60년대 말 우리나라 스포츠 수준으론 세계 제패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앞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 같은 체격과 체력 조건이라면 우리의 노력 여부에 따라 승패가 갈리리라. 나는 처음 맞는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의욕과 자신감에 충만했다.

대한체육회는 방콕 대회 개막일 만 1년 전부터 선수촌 일부를 개장하고 강도 높은 훈련에 들어갔다. 26차례의 인터벌 트레이닝을 실시하는 등 기초체력 강화에 중점을 두었고 방콕의 기후를 감안해 무더위 극복 훈련 프로그램까지 도입했다. 65년 여섯 명이었던 외국인 코치 수는 1년 뒤 15명으로 늘었다. 나는 이들을 활용해 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고 코치들의 지도 방법을 개선하고 싶었다. 외국인 코치를 둔 종목은 육상.수영.레슬링.사격.역도.유도.농구.테니스.배구 등이었다. 외국인 코치는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목표는 종합 2위. 체육회는 금메달 아홉 개, 은메달 18개, 동메달 31개 등 모두 58개의 메달을 기대했다. 일본의 독주는 막을 길이 없었다. 육상과 수영 등 대부분의 종목에서 일본이 금메달을 휩쓸 것은 분명했다. 우리의 현실적인 맞수는 개최국인 태국이었다. 이때까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개최국의 종합 2위는 마치 관례처럼 계속돼 왔다. 태국이 종합 2위 달성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육상에서 우리를 능가하는 인도와 말레이시아도 경계해야 할 나라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종합 2위의 목표를 이뤘다. 우리는 18개국에서 25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 이 대회에 15개 종목 233명(선수 181명, 임원 52명)을 파견해 금 12개, 은 18개, 동 21개 등 모두 51개의 메달을 따냈다. 태국과 금메달 수는 같았으나 은메달(14개)과 동메달(11개) 수가 많았다. 태국과의 2위 다툼은 불상사와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경쟁심이 지나쳐 오기와 자존심 대결로 격화되면서 양측은 이전투구 양상으로까지 치달았다. 농구장에서는 주먹다짐에 편싸움까지 벌어졌다.

이 대회를 통해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실감했다. 메달밭인 육상에서 기록 향상을 이루지 못하면 아시아 2위의 자리조차 허상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방콕 대회에서 육상에 걸린 금메달은 모두 34개였다. 이들 금메달은 대부분 일본의 몫이었고 우리는 들러리에 불과했다. 수영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른 어떤 종목의 금메달보다 육상과 수영의 금메달이 값지다고 생각했다. 메인 스타디움에 오르내리는 일장기를 바라보며 나는 결심했다. 4년 후, 제6회 대회에서는 기어이 메인 스타디움에 태극기를 올리고 말리라고.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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