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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속에 숨은 이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책가방을 든 순옥이가 집안에 들어서니까 이상했다. 여느날과 달리 집안이 훤했다.
왜 갑작스레 집안이 훤할까. 이번 학기에는 틀림없이 순옥이가 부반장으로 당선될꺼야 하는 몇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왔기 때문일까! 순옥이는 고개를 갸웃갸웃 해보았다.
순옥이는 집에 들어서면 저절로 눈길이 가는 응접실 책장 있는데를 보았다.
순옥이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버지의 사진이 없다. 공책 크기만한 사진틀이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을 넣은 사진틀이었다.
외동딸 순옥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기다려주시는 어머니가 안계신다.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이기 때문에 순옥이보다 늦게 집에 돌아오신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순옥이를 혼자 마중해주는 것은 빙긋이 웃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이다.
집안이 갑작스레 훤해지고 아버지의 사진틀이 보이지 않고 이상하다.
순옥이는 움쩍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선채 커다랗게 뜬 눈으로 살펴 보니까 유리창들이 깨끗하게 닦아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진틀은?
안방 쪽에서 쿨룩거리는 기침소리가 들렸다. 외할머니의 기침소리다.
순옥이는 입을 뾰로통 내밀면서 자기공부방에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지난 한달 가량 어슴푸레 하게만 생각되던 일이 지금은 또렷하게 순옥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별로 오시지 않던 외할머니가 자주 찾아오셨고, 그때마다 외할머니는 순옥의 눈길을 피해가면서 귀엣말로, 그것도 길다랗게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하셨다. 어머니는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얼마뒤였다. 순옥이가 보니까 어머니가 경대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전보다 긴 것 같고,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어머니의 얼굴의 화장도 전보다 더 짙어져 있는 것 같았다.
또 늘 학교에서 똑바로 집으로 오시던 어머니가 밤늦게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순옥이가 자기생각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못보았는데 순옥의 책상위 한가운데 네모난 하얀 봉투가 놓여있고 그 위에는 빨간 카네이션 한송이가 얹혀 있었다. 하얀봉투에는 「사랑하는 순옥에게, 엄마」이렇게 적혀있었다. 순옥이는 봉투를 뜯어 그속에 있는 어머니의 짤막한 편지를 읽고 나자 순옥의 두눈은 눈물로 핑그르 돌았다. 순옥의 눈물방울은 어머니가 쓴 글자위에 떨어져 젖어들었다.
이튿날.
반아이들은 반장선거 이야기로 꽃피웠고 교실안은 술렁거렸다. 반장에는 이번 학기도 이동식이가 가장 유력한 후보자였다.
부반장에는 김순옥이와 오미라가 팽팽하게 맞붙었다. 선거란 묘한 거다. 반장 후보로 나서는 어린이만 설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후보를 미는 어린이들도 자기 일처럼 바쁘다.
그런데 순옥이를 미는 은실같은 아이는 미라, 그것도 미라의 안경이 밉기 때문에 순옥이를 부반장으로 뽑자고 설치고 다녔다. 은실이는 며칠전 자기가 보던 떨어진 만화까지 학교에 한아름 안고 와서 공부못하는 머슴애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순옥의 선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라의 흉을 보았다.
미술시간 다음 맨 나중 시간에 반장선거가 있기로 되어있다. 그러나 순옥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된채 석고처럼 자기 책상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지금 순옥의 머리 속에 꽉 차있는 것은 반장선거가 아니다. 어머니 생각뿐이다. 다른 아이들은 못보고 있지만 순옥의 두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어젯밤 이불속에서 끝없이 울고 울었기 때문이다.
미술이간이었다.
담임인 선우선생이 교탁앞에 섰다. 아이들이 떠들지도 않는데, 버릇대로 하는 첫마디.
"조용햇"
그만 아이들은 웃음을 일제히 터뜨리고 조용했던 교실이 도리어 소란스러워 졌다.
선우선생은 멋적은 듯 언제나 텁수룩한 머리를 한 손으로 긁적이다 흑판에 분홍분필로 이렇게 썼다.
「우리 아버지·우리 어머니」
"자 여러분, 오늘 그림 제목은 아버지얼굴이나 어머니얼굴을 그리셔요."
선우선생님의 굵직한 목소리는 순옥의 머리를 꽝하고 치는 것 같았다. 순옥의 머리속에는 순정소녀만화에서 본「운명」이란 두 글자가 나타났다.
순정만화 속 소녀주인공은 두 눈이 유난히 컸는데, 자기는 두 눈이 그리 크지 않는데도 순정만화 속 주인공만큼 운명에 희롱당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 순옥이가 어버지의 얼굴을 그린다면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어디론가 없어진, 늘 보던 책장이 놓여있던 빙긋 웃고 계시는 아버지의 다정한 얼굴을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웃음대신에 슬픔에 찬 아버지를 그려야 한다.
지금 어머니의 얼굴을 그린다면 그것은 무슨 얼굴에 될까. 순옥이는 흰도화지에 아무 것도 그리지 못하고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많은 다른 좋은 그림 제목을 다 제쳐놓고 하필이면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일까. 선생님은 순옥의 마음속 비밀을 알고 내놓은 제목일까.
순옥이는 좀 뒤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휙 교실을 나가버렸다.
순옥이와 한 책상에 앉아있던 아이가 순옥의 도화지를 들여다보았다. 그아이는 두눈이 커다랗게 되면서 선생님을 향해 소리쳤다.
"선생님! 김순옥이가 가출입니다. "
"뭐! "
"선생님 이것보셔요 ! "
그 아이가 번쩍 쳐들어 보인 순옥의 도화지에는 검은 크레용으로
"아빠, 엄마! 난 집을 나가! "
교실안은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다 말고 수런수런 했다.
그때 맨 앞에 앉은 「구멍가게 창구멍」이란 별명을 가진 아이가 선생님에게 말했다.
"순옥이 엄마가 시집간데요. 근데 순옥이는 새아빠가 싫은가 봐요! "
미술시간 다음에 예정대로 반장선거가 있었다. 순옥의 가출이란 뜻하지 않은 일로 반장선거는 별로 열기를 띠지 못하고 착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이동식이가 반장 후보로 나와서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번에 저를 반장으로 선출해주면 우리 반에서 제일 슬픈 사람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
박수가 터졌다. 그것은 순옥이를 두고 말한 것같다. 동식의 말은 다시 계속되었다. "제가 반장으로 선출된 즉시 가출한 순옥의 수색대를 만들어 순옥을 집으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
수색대를 조직한다는 말을 듣고 남자어린이들은 신이나서 손뼉을 쳤다.
순옥이와 함께 부반장 후보인 오미라가 나와서 말했다.
"저는 부반장 입후보를 사퇴하겠어요. 저도 김순옥에게 한표 던지겠어요. 지금 슬픈 마음으로 있는 김순옥에게 부반장의 기쁨을 안겨주어서 김순옥의 슬픔을 삭여드리고 싶어요. "
이렇게 되고 보니까 투표없이 반장에는 이동식, 부반장에는 김순옥으로 결정되었다.
반장이된 이동식은 남자어린이 여자어린이 합동으로 가출 김순옥 수색대대원 10명을 뽑았다. 대원 10명 뽑는 일이 반장선거보다 더 어려웠다.
곧 학교교문을 의기양앙하게 빠져나온 수색대원들은 순옥이를 발견하는데 적이 3시간은 걸렸다. 희망사진관 쇼윈도앞에서 면사포를 쓴 신혼부부의 사진을 멍하니 보고 있는 순옥이를 수색대원들이 포위하자 한아이가 순옥의 손을 잡았다. 물론 순옥의 손을 잡은 것은 여자어린이다.
수색대원들이 순옥이를 집에 데리고 가니까 선우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밤도 깊어 수색대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선우선생님만이 혼자 남아계셨다.
선우선생님은 순옥에게 오늘 반장선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구들이 순옥의 슬픔을 걱정하여 주는 부반장이란 꽃다발을 기쁘게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만화속에 나오는 계부·계모를 현실속의 새아빠·새엄마와 혼돈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이튿날.
교탁앞에 반장이된 이동식이와 부반장이 된 김순옥이가 나란히 섰다.
선우선생이 이동식의 왼쪽 가슴에 반장배지를 달아주었다. 반장 배지를 달고 난 이동식이가 복도쪽을 향하여 소리쳤다.
"왕자 입장! "
교실문이 열리더니 칼을 찬 왕자가 뚜벅뚜벅 순옥이 앞으로 걸어왔다. 순옥이가 자세히 보니까 자기 앞에 다가서는 것은 동극도 아닌데 왕자 복장을 한 오미라였다. 왕자는 순옥의 가슴에 부반장 배지를 달아주었다.
이동식이가 또 소리쳤다.
"왕자, 키스! "
오미라가 정말 순옥의 볼에 입술을 맞추려고 했다.
순옥이가 질겁을 하여 교실구석으로 도망쳤다. 왕자는 계속 순옥이를 쫓아다녔다. 교실은 박수와 웃음소리로 떠들어댔다. 순옥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선우선생이 「조용히!」하고 외쳤다. 교실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여러분들은 어려운 산수문제보다도, 아니 고등학교 학생들이 푸는 수학문제보다도 어려운 김순옥의 인생문제를 풀어주었습니다. 그 상으로 앞으로 한달 동안 숙제를 내지 않겠습니다. "
학교를 파하고 순옥이가 집가까이 왔을 때 순옥의 입에 나지막하게 저절로 속삭임이 나왔다.
"엄마, 시집 가셔요! "
그때 이름모를 새가 날개를 눈부시게 반짝이면서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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