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집 없는 서민 울리는 채권입찰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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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은 우리사회지만 요즘 아파트추첨은 희화의 지경을 넘어 아무래도 어떤 파탄의 예고만 같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동인가. 지난해 5월 아파트투기진정의 묘방으로 채권입찰제가 채택된지 만 1년이 되기도 전에 채권액이 끝내 집 값을 넘어섰다. 최근 서울개포동의 어느 아파트에서는 집 값의 자그마치 1·5배까지 기록, 문자그대로 배보다 큰 배꼽이 뚜렷해졌다.
물건은 깎아 사야 맛이고 에누리를 안하면 속아 산 느낌을 갖는 한국인들이 어찌된 셈인지 아파트만은 업자들이 이익을 붙여 매긴 집 값에다 그 집 값보다 더 많은 웃돈을 주고 못 사서 안달이니 속된말로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태는 명백하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정상적으로 집을 사면서 다른 집 한 채 값을 더 주고 살 수는 없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내집」을 처음으로 마련하려는 집 없는 사람이 아닐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집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들이지 않고 큰 돈버는 수단으로 여기는 돈 가진 투기꾼들과 악덕 복덕방업자들의 농간에, 거기 끼어 재산증식을 노리는 부유층 일부가 가세해 돈 놓고 돈 먹는 난장판이 되어있는 것이다.
서울의 집 값이 비싸다고는 하지만 요즘 채권액을 포함한 신축분양아파트가격 평당 3백만원선은 기존 아파트나 일반 주택 값에 비해서는2배가량 턱없는 가격이다. 그러고도 그 분양가격에 또다시 프리미엄까지 붙어 거래가 된다면 이것은 이미 「집」의 거래가 아니다.
이 돈 놓고 돈 먹는 노름에 업자는 은근히 부채질을 하고 있고 정부도 팔짱끼고 방조하는 꼴이다. 그 바람에 피해를 보는 사람은 누굴까. 말할 것도 없이 정말 집 없는 서민들이다. 10년, 20년 저축 끝에 어렵사리 기천만원 목돈을 모아 내집 한 칸을 마련하려는 서민들의 꿈은 이들 돈 가진 투기꾼들의 한판에 몇 천만원 돈 놓고 돈 먹기 노름판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제 턱걸이 아니라 뜀뛰기를 해도 미칠 수 없게 값이 올라버린 것이다. 신축아파트가 뛰자 다른 집 값도 덩달아 뛰어 집 값은 「한자리물가」와는 관계없이 논다.
채권입찰은 당초 투기성부동자금의 흡수를 주안으로 한 처방이다. 투기의 차액을 정부가 흡수, 주택건설자금으로 활용하자는 취지다. 1년 미만에 약 1천억원의 기금이 모아졌으니 그 점만으로는 성공이라면 성공이다.
그러나 이는 이제 와서 「쥐잡으려다 독 깨고」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우는」정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집없는 서민들에게 싼값에 자기 집을 갖게 하는 것이 주택정책의 방향이라면 현재와 같은 채권입찰제의 방치는 서민들에겐 영구히 집 장만의 기회를 박탈하고 심각한 심리적 손상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제도란 일장일단이 있게 마련이다. 채권입찰제도 나름의 배경과 논리는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황의 방치는 있을 수 없다. 시급히 손을 써야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가 손쓰기 전에 투기와 직·간접으로 관계 있는 시민들이 「이성」으로 사태를 헤아려 보았으면 한다. <신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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