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첨성대·물시계의 슬기 이어가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지금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은 세계 몇째쯤이나 될까? 이따금씩 어느 특정분야 기술에서 한국인이 세계 세 번째, 또는 네 번째로 무엇을 만들었다는 보도가 있다. 하지만 극히 예의적인 몇 가지를 빼면 아직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은 그저 중진국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런 현실에 비한다면 우리 조상들은 지금의 우리보다는 월등히 앞선 수준에 이르고 있었던 적이 많았다. 그중 가장대표적 기간으로는 6세기 전후의 삼국시대와 15세기의 조선초기를 들 수 있다. 이 시대에 한국인의 과학기술은 그야말로 세계적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6세기 전후의 한국 과학기술 수준은 한국보다는 오히려 이웃 일본에 그 유적을 남기고 있다. 이 시대 일본문화의 중심을 이뤘던 나량 (나라) 지역에는 삼국시대 한국 과학기술자의 유적이 얼마든지 남아있다. 7세기초 고구려의 승이며 화가였던 담징이 법륭사 금당벽화를 그린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 일본에 처음으로 종이·먹·염료를 소개한 것으로 일본과학사에는 적혀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특히 백제로부터 많은 조사공·조불공과 로반 박사 (탑의 첨단부분 기술전문가)·와박사 및 정원기술자까지 파견되었다. 의박사·역박사와 채약사도 백제에서 모셔갔다는 기록이 있다. 왕인과 아직기로 대표되는 백제학술의 일본전달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지금 나량의 동쪽언덕에 우뚝 솟아있는 동대사에는 높이 16m·무게 5백t의 대 불상이 있다. 일본인 과학사 학자의 평가로는 이 대불의 주조기술이 바로 백제인의 것이었다.
삼국의 통일이 신라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는 백제유적이 많지 않은 셈 이다. 하지만 이 시대 삼국문화의 뛰어남이 일부 신라유적으로 우리에게 남겨졌다고 하겠다.
또 우리가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경주의 첨성대는 이 시대 과학문화의 상징적 유적이라 하겠다.
삼국시대 보다 훨씬 분명하게 많은 증거가 남아 있는 우리 과학문화의 또 다른 절정기는 15세기 초였다. 이미 측우기로 잘 알려진 세종대가 대표적이다.
사실 세종대전후의 뛰어난 과학기술업적은 측우기 한가지로 대표될 수 없는 위대한 것이었다. 같은 시대의 세계 어느 곳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 수많은 과학기술상의 업적이 세종대 이 나라에서 이루어졌다.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9세기전후 아랍과학은 인류사를 찬란히 수놓아줄 뛰어난 공헌이었다. 또 원대의 중국과학 또한 그에 못지 않은 발달을 보였다. 그러나 15세기초라는 역사적 시점에서는 세종대의 한국과학이 세계적 수준에 있었다는 말이다.
세종대에는 너무나 많은 과학기술상의 성취가 있었다.
여러 천문 관측 기구가 새로 만들어져 실제 관측이 시행되었고 측우기도 만들어졌다.
농업과 인쇄·의약 등 수많은 기술상의 개발도 추진되었다.
구체적인 예를 둘만 들어보자. 거의 일반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은 동표란 것과 제법 널리 알려진 자격루 (자동물시계)가 그것이다.
세종은 천문관계 시설을 경복궁 안의 경회루 주변에 여럿 만들어 두었고 그중 북쪽에 세운 것이 10m 높이의 구리기둥(동표) 이었다.
원래 표란 것은 동양에서 해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기 위해 마당에 세우는 기둥을 말한다. 1년의 길이를 보다 정확히 측정하고 동지 날을 보다 확실히 알아내기 위해서는 이 장치가 절대로 필요한 것이었다. 세종대의 천문 역산학자들은 바로 이런 장치를 이용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 고유의 역법인『칠정산』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웃 중국이나 일본이 예부터 2m 높이 정도의 표를 썼는데 비해 세종대에는 그것을 5배 높여 10m로 만든 것이었다. 기둥이 높아질수록 그림자길이 측정의 오차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세종대의 동표에는 꼭대기에 지른 가로막대의 그림자와 태양의 영상이 겹치도록 이동식 암실장치를 그림자측정 위치에 시설했다. 지금부터 5백년 이전에 이미 그렇게 크고도 정밀한 태양고도 측정장치를 만들어 이용한 것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회루 연못을 사이에 두고 동표의 건너편 연못 남쪽에는 보누각이란 건물이 세워졌고 그
곳에 장영실의 자격루가 설치되었다. 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물시계에는 북과 종과 징이 달려있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각에 따라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어 있었다. 또 시각의 울림과 함께 시각을 알리는 팻말이 나타나도록 인형이 장치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흐르는 물의 힘으로 자동으로 진행되는 교묘하기 짝이 없는 물시계였다.
옛 기록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 수는 있건만 지금 경회루 못 가게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10m짜리 동표도, 자동 물시계도, 그 밖의 모든 천문기구와 함께 사라져갔다. 지금 우리가 쓰는 1만원 짜리 돈에는 세종의 초상과 함께「물시계」가 그려져 있지만 이 그림은 지금 덕수궁 한구석에 버림받듯이 놓여있는 물통 몇 개뿐이다. 이것은 정확히 말한다면 세종대의 것이 아니라 그 뒤 중종 대에 만들어졌던 자격루의 물통일 뿐 「물시계」는 아니다.
용이 그려진 물통만을 보고 우리 선조 들이 어떻게 시각을 측정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어설픈 물통 몇 개만으로 무슨 시간을 쟀다는 것일까 하고 조상의 슬기를 오히려 의심하는데 이바지할지도 모른다.
이「물시계」모습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 과학문화유산을 어떻게 보고있는가를 잘 웅변해 준다. 사실 우리는 결코 남부럽지 않은 과학문화를 가진 민족이건만 이를 모르는 체 우리는 한국인의 과학적 능력을 과소 평가하는 수가 많다.
조금만 노력하면 교묘한 세종대의 물시계를 복원하여 그 정교한 과학성을 세계에 드러내 보일 수 있으련만 물통 몇 개만 보면서 우리 스스로를 격하하고 있는 꼴이다.
과학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은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서, 또 앞으로의 과학발달을 위한 정신적 자세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또 남과 북이 다투고있는 민족문화의 정통성 계승문제에도 중요한 부분이 된다.
우리가 지금 「과학의 날」을 기념하고「과학의 달」을 두는 것은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으로의 우리 자세를 가다듬는 데 그 뜻이 있다. 「과학의 달」을 맞아 첨단기술의 개발만이 아니라 우리의 과학전통을 개발하여 바르게 계승하려는 노력에도 눈을 돌려야 할 것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