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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9가지 성찰 베토벤 교향곡으로 음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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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호 16면

“따따따 딴~.”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20~23일

베토벤의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교향곡 제 5번의 주제는 흔히 ‘운명의 노크소리’라 불린다. 이 소리는 21세기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강력하다. 세 개의 짧은 음과 한 개의 긴 음표가 불러일으키는 그 팽팽한 긴장감은 늘 긴장 속에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며 우리 정신의 각성을 촉구한다. 이 교향곡이 작곡된 지 200년이 넘은 지금도 우리가 여전히 베토벤의 음악에 끌리는 까닭은 그의 음악이 ‘인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베토벤이 자신의 교향곡 9곡에 담아낸 인간애를 느끼고 싶다면 20일부터 23일까지 계속되는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이하 RCO)의 내한공연을 결코 놓칠 수 없다. 세계 최정상의 기량을 지닌 RCO의 연주력은 베토벤 교향곡의 음표들에게 어떤 생동감을 불어넣을 것인가. 더구나 참신하고 독창적인 음악해석으로 주목받고 있는 지휘자 이반 피셔(64)가 함께 할 예정이어서 RCO의 이번 내한공연은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 올해 최고의 클래식 공연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무엇보다 전 곡을 나흘에 걸쳐 모두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이번 공연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 유명한 ‘운명’뿐만 아니라 청년 베토벤의 패기를 담은 제 1번에서부터 말년의 대작인 제 9번 ‘합창’까지를 나흘 간 감상하는 일은 어쩌면 우리 삶을 변화시킬 만큼 강렬한 체험이 될 수도 있다. 교향곡 제 1번에서 제 9번까지의 9곡은 베토벤 자신의 초상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9가지 성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기를 승리로 바꾼 음악가의 초상
RCO는 이번 내한공연에선 거의 작곡 순서대로 연주할 예정이어서 베토벤의 변화 과정을 더욱 잘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공연 첫날인 20일에는 초기 교향곡인 제 1번, 제 2번과 함께 제 5번이 연주된다. 둘째 날엔 제 3번과 제 4번, 셋째 날엔 제 6번과 제 7번, 마지막 날엔 제 8번이 연주된 후 마지막 교향곡인 제 9번 ‘합창’이 대미를 장식한다.

교향곡 제 1번부터 제 9번 ‘합창’까지의 여정은 베토벤이라는 한 개인으로 출발해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으로 확산되어가는 거대한 ‘크레센도’(crescendo·점점 크게 연주하라는 악상 지시어)다.

제 1번을 작곡할 당시 베토벤은 만 29세의 패기 넘치는 청년으로 아직 그의 귓병은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에겐 야심이 있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첫 교향곡을 선보이는 1800년 4월 2일의 음악회에서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을 함께 연주함으로써 암묵적으로 자기 자신을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거장 음악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베토벤은 이 음악회를 통해 황제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 장차 빈 궁정으로 진출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물론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 빈의 ‘일반음악신문’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 1번에 대해 “대단한 예술, 새로운 작품, 아이디어의 충만함”이라 호평했다.

실제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 1번은 그의 첫 교향곡임에도 독특한 점이 많다. 마치 낡아빠진 옛 궁정음악을 비웃듯, 악보에 ‘미뉴에트’라 써놓고는 미뉴에트라고 볼 수 없는 빠르고 풍자적인 악상을 펼쳐놓은 3악장 하나만으로도 청년 베토벤의 강한 자신감과 빛나는 개성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베토벤에게 곧 위기가 찾아왔다. 26세 때부터 청력에 이상을 느껴왔으나 자존심 때문에 숨겨왔던 베토벤은 서른 살이 되자 더 이상 귀의 이상을 숨길 수 없었다. 귓병을 고치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마지막 방법으로 빈의 시끌벅적한 소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조용한 시골마을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여섯 달을 보냈지만 별무소용이었다. 귀머거리가 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 베토벤은 동생에게 유서에 가까운 절망적인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는 죽음 대신 그의 내면에서 더욱 강력해진 예술혼을 택했다. 그리고 이는 교향곡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영웅’ 교향곡을 탄생시켰다. 연주시간 50분에 육박하는 교향곡 제 3번 ‘영웅’은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는 비범한 걸작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1악장의 독특한 리듬, 2악장 ‘장송 행진곡’의 폭넓은 감정표현, 3대의 호른이 연주하는 영웅적인 연주는 고통을 극복한 인간의 강한 자기긍정이자 의지의 표현이다.

탁월한 ‘내면의 귀’를 지닌 음악가
자살 충동을 이겨낸 후 더욱 강하게 자신의 개성을 담아내기 시작한 베토벤은 30대 후반의 나이에 대표작인 ‘운명’과 ‘전원’을 연달아 작곡했다. 1808년 12월 22일 함께 초연된 제 5번 ‘운명’과 제 6번 ‘전원’은 같은 날 연주된 쌍둥이 같은 작품이지만 두 곡은 전혀 닮지 않았다. ‘운명’이 인간 의지의 승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전원’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말하고 있다. ‘운명’이 극도의 긴장과 역동성을 표현한다면 ‘전원’은 극도의 이완과 평화를 담고 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긍정적인 정신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두 교향곡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진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음악가가 아니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인간애’가 풍겨 나온다.

베토벤은 점차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그의 음악은 더욱 생생한 소리로 표현되었다. 귀가 들리지 않을 수록 ‘내면의 귀’는 더욱 밝아졌기 때문이리라.

말년에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오로지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며 작곡을 해야 했던 베토벤은 1824년 5월 7일 마지막 교향곡 제 9번 ‘합창’을 대중 앞에 선보였다. 빈의 케른트너토르 극장에서 ‘합창’이 초연되었을 때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은 놀라움과 경외감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베토벤은 청중의 박수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당시 합창단에서 소프라노 파트를 노래했던 그레브너 부인은 “베토벤은 연주에 맞추어 악보를 읽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한 악장이 이미 끝났는데도 페이지를 계속 넘겼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는 음악가가 작곡한 ‘합창’은 경이롭다. 인간의 의지를 확립하는 1악장으로 시작해 인류애를 노래하는 4악장으로 이어지는 ‘합창’은 단순히 교향곡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 그 자체다.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베토벤이 오히려 더욱 생생한 소리로 우리 정신을 고양시키고 우리의 마음에 뜨거운 인류애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베토벤에게 외면의 귀를 능가하는 탁월한 ‘내면의 귀’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0일(월): 베토벤 교향곡 1, 2 & 5번(운명)
21일(화): 베토벤 교향곡 3번(영웅) & 4번
22일(수): 베토벤 교향곡 6번(전원) & 7번
23일(목): 베토벤 교향곡 8번 & 9번(합창)

이반 피셔와 RCO가 그려낼 새로운 베토벤
청년 베토벤의 열정부터 노년 베토벤의 인류애까지 담고 있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로서는 커다란 도전이다. 음악 애호가들에겐 너무나 잘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이미 수많은 음반을 통해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진 터라 새로운 연주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연주엔 정답이 없기에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따라 수천 가지 가능성이 존재한다. 특히 지휘자 이반 피셔라면 참신한 연주를 기대해 볼만하다.

2007년 부다페스트 페스티벌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했던 피셔는 기존의 관행을 깬 오케스트라 자리 배치로 독특한 음향세계를 선보이며 국내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대개 무대 가장자리의 조연으로 머물던 첼로와 더블베이스를 당시 무대 중앙으로 배치해 더욱 강력한 소리를 뿜어내도록 했다. 단 아래로 배치된 호른과 트럼펫은 전체 오케스트라 소리와 조화를 이루었다. 평소 잘 들리지 않던 선율을 부각시켜 참신한 느낌을 전한 그의 지휘 덕분에 잘 알려진 차이콥스키 교향곡도 새롭게 들렸다.

이번 공연에서도 이반 피셔는 그동안 우리가 주목하지 못했던 베토벤 교향곡의 새로운 면을 일깨워 주리라 생각된다. RCO의 정교한 합주력 또한 기대를 모은다. 세계 그 어느 오케스트라보다도 탁월한 기량을 자랑하는 RCO의 앙상블을 통해 베토벤 교향곡의 감동은 한층 더 커지리라 기대해본다.

글 최은규 음악 칼럼니스트 herena88@naver.com, 사진 중앙포토·빈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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