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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40만 나라의 줄타기 협상술에 열강들 고개 숙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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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호 11면

민토프 몰타 총리(왼쪽)와 캐링턴 영국 국방장관이 1972년 3월 26일 런던의 말버러 하우스에서 몰타의 기지 사용에 관한 원조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몰타. 올해로 우리나라와 몰타가 수교한 지 5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일 마리 루이즈 프레카 몰타 대통령과 축하 메시지를 교환했다. 냉전 시절 몰타는 동서 양 진영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지정학적으로 유사하다. 미국·소련·영국·이탈리아·프랑스에다 인접한 리비아와 아랍국가들까지. 그런 여건에서 몰타는 국제협상사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주변 열강과의 협상을 통해 국익을 키운 무용담이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여부로 미·중 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교 50주년 몰타에서 배우는 외교협상의 정석

기지 사용료 깎으려는 영국에 역공
몰타는 지중해 중간, 이탈리아와 리비아 사이에 있는 아주 작은 섬나라다. 인구는 42만 명 남짓.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64년 독립했다. 유럽과 북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이라 독립 후에도 영국군이 주둔했다. 연간 500만 파운드(당시 약 1400만 달러)의 지원금 등 영국군 기지에 따른 수입이 몰타 국민총생산(GNP)의 20%에 달할 정도로 비중이 컸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해군본부도 몰타에 있었다.

그러나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발전하면서 몰타의 전략적 가치는 크게 줄게 된다. 정찰기의 성능 향상으로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도 북아프리카 지역을 감시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67년 수에즈 운하 폐쇄는 몰타 경제에 결정타였다.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통로가 차단되면서 몰타의 군사·해운상의 가치가 떨어졌다.

영국은 기지 유지비를 줄이기 위해 협정 개정을 추진했다. 그동안 지원금 중 75%는 무상공여, 25%는 차관 형식으로 지불해왔는데 앞으로는 25%만 무상으로 하고 75%는 차관으로 돌려 몰타가 상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운하 폐쇄 이후 경제 침체를 겪고 있던 몰타에는 큰 타격이었다.

국가적 위기에서 71년 돔 민토프(Dom Mintoff) 총리가 취임했다. 그는 주변 열강의 몰타에 대한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영국과 협상을 벌였다. 영국과 달리 다른 나토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인접한 몰타의 운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 역시 지중해에서 급증하고 있는 소련 해군력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코앞에 있는 몰타가 나토 혹은 소련의 군사기지로 이용되는 것만은 막으려 했다. 소련은 지중해 진출을 위해 몰타를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영국의 더타임스는 “핵 시대에 몰타의 전략적 가치는 거의 없으나 소련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큰 소용은 없으나 버리기는 아까운 ‘계륵’이었던 셈이다.

중립 외치며 협상력 키워 국익 5배로 늘려
계륵으로서의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것이 민토프의 협상 전략이었다. 기지 사용료를 낮추려는 영국에 오히려 “현재의 지원금은 몰타의 지정학적 가치에 비해 너무 적은 액수”라며 대폭 올리든지 아니면 떠나라고 요구했다. 몰타의 항만은 소련과 아랍권 선박의 기항 및 수리를 위한 수요도 크기 때문에 영국이 떠나도 그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단순한 엄포가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주며 요구사항을 관철시켜 나갔다. 예컨대 민토프는 총리 취임 직후 미군 함정의 몰타 진입을 금지시켰다. 자국의 중립성을 해친다는 이유에서다. 이는 미국의 주의를 환기시켜 이후 영국과의 협상에 유리하게 작용됐다.

한편 리비아가 몰타에 100만~150만 파운드의 경제 지원을 제공했다는 얘기가 서방 언론에 보도됐다. 화가 난 영국은 몰타와의 방위협정을 중단하고 경제지원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민토프는 영국 대신 러시아나 리비아에서 경제지원을 받을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 기세에 놀란 영국은 앞으로 몰타에 연간 850만 파운드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영국의 발표가 나온 직후 몰타 주재 소련 대사가 민토프를 찾아가 경제지원 의사를 밝혔다. 직후 민토프는 리비아로 날아갔다. 리비아 역시 몰타 측에 상당한 금액의 경제지원을 약속했다. 이스라엘과 6일전쟁을 치른 아랍권도 몰타의 중립을 요구하며 영국이 제시한 금액 이상의 기지 사용료를 몰타에 제의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위기를 느낀 미국 등 서방 진영의 압력으로 영국은 새 제안을 내놓았다. 기지 사용료로 950만 파운드를 지급하고 추가로 480만 달러의 개발 지원금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민토프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도로·통신 등 시설 사용료를 별도로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끝내 영국은 ‘굴욕적’이라고 해도 좋을 최종 합의문에 서명해야 했다. 영국이 부담하는 연간 기지 사용료는 당초 500만 파운드에서 1450만 파운드로 세 배로 뛰었다. 아울러 영국 및 나토 국가들로부터 700만 파운드의 개발차관도 추가로 끌어냈다. 협상 과정에서 이탈리아(250만 파운드)와 리비아(150만 파운드)로부터 받아낸 지원금까지 합치면 원래 액수의 5배가 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이다.

민토프는 영국 및 나토의 이러한 지원이 단지 기지 사용에 대한 대가일 뿐이라고 못 박고 몰타의 중립적 위상이 훼손되지 않도록 했다. 반면 영국 및 나토가 얻은 것이라곤 향후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함대가 몰타의 항만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 정도였다.

주변 열강의 세력 균형점 찾는 게 열쇠
한 국가를 지탱하는 중요한 두 축은 안보와 경제다. 냉전시대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둘 다 해결할 수 있어서 별로 고민할 게 없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크게 달라졌다. 안보는 한·미 동맹체제로 유지되지만 경제의 주요 파트너는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중국은 2004년부터 미국을 제치고 우리의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했다. 10년이 지난 2014년 중국과의 교역량은 한·미 교역의 배가 넘었다.

문제는 안보와 경제의 주요 파트너인 미국과 중국이 상호 대립관계라는 점이다. 이것이 21세기 한국의 딜레마다. 최고의 안보동맹인 미국과 최대 교역 상대국인 중국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며 국익을 지키고 통일을 이뤄가야 하는 게 우리의 상황이다. 이 때문에 박근혜 정부도 ‘조화외교’를 표방하고 있으나 쉽지 않은 현실이다. AIIB 참가를 결정하기까지의 우여곡절과 사드 배치를 둘러싼 논란과 고민이 이를 잘 보여준다.

로버트 페이프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21세기 국제질서의 근간을 ‘연성 균형(soft balancing)’으로 설명한다. 미국이란 초강대국의 1극체제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유럽 등에서는 군사력이 아닌 외교·경제 등으로 균형을 맞춰가려고 한다는 얘기다. 현재 중국이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AIIB가 전형적인 예다.

연성 균형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의 외교력과 협상력이다. 몰타가 주변 열강 간 세력 균형점을 절묘하게 찾아가며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한 협상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협상력을 뒷받침해 준 것은 몰타의 중립적 스탠스였다. 동서 열강의 어느 한쪽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하게 자국의 행동반경과 선택범위를 넓힘으로써 강대국들을 상대로 놀라운 결과를 끌어낼 수 있었다. 유럽의 중소 국가인 스위스·오스트리아·스웨덴·덴마크가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서 중립 전략을 취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명분보다 이익·관심사에 주목해야
우리 역사에도 탁월한 협상력으로 난국을 극복한 예가 없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서희의 담판이다. 고려 성종 때 거란의 80만 대군이 쳐들어왔다. 무조건 항복하고 평양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했다. 조정에서는 거란의 요구대로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서희 장군은 달랐다. 당시 대륙의 정세로 볼 때 거란의 진정한 관심사는 고려의 땅이 아니라 송나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배후의 불안 요인을 없애고자 하는 것임을 읽은 것이다. 그래서 홀로 당당하게 적장 소손녕을 찾아가 거란과 화친을 맺고 교통하려면 압록강 변의 여진족을 토벌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손녕은 이를 받아들이고 철군했다. 이로써 고려는 영토를 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넓힐 수 있었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겉에 내건 입장이 아니라 서로의 심중에 있는 관심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서희의 담판은 그런 현대 협상이론에 부합하는 세계적 성공 사례다.

미국의 언론인이자 국제정치학자인 돈 오버도퍼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 “한국은 잘못된 크기로 잘못된 위치에 있어온 나라”라고 한 바 있다. 97년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서다. “한국은 주변국들이 침략을 하고 음모를 꾸밀 만큼 크고 좋은 위치에 있는 반면, 강대국들에 최우선적 고려 대상이 되기엔 너무 작은 나라다. 그로 인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인정받기보다는 부수적이고 종속적인 신세를 면치 못해 왔다.”

한국의 국력과 위상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열강에 둘러싸인 약소국’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지닌 ‘강중국(强中國)’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국익과 자존을 지켜가야 하는 현실은 그대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와 수교 50주년을 맞은 몰타의 외교 협상이 주는 교훈은 크다.


강영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로 10년간 일했다. 하버드대를 거쳐 조지메이슨대 갈등해결연구원(ICAR)에서 갈등해결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겸임교수. 저서는 『갈등해결의 지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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