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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못지 않은 ‘더블’ … 그린 문화 바꾸는 주부 골퍼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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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호 23면

줄리 잉크스터와 두 딸 (왼쪽 코리, 오른쪽 헤일리). [사진 LPGA]

2007년 미국의 스포츠 전문매체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활약 중인 한국 선수 2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닮고 싶은 롤모델은 누구인가’라는 항목에서 한국 선수들은 줄리 잉크스터(55·미국)를 단연 1위로 꼽았다. 당시 설문에 응했던 장정(35)은 “어릴 때 잉크스터는 내 삶의 일부였고 영웅이었다. 나도 그처럼 엄마가 되고 싶다. 그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잉크스터는 여전히 강하고 훌륭한 선수이자 엄마”라고 말했다.

LPGA에 기혼 선수 붐

 1983년 투어에 뛰어든 잉크스터는 올해도 투어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롱런하고 있는 ‘살아 있는 전설’이다. SI의 설문조사 이후 8년이 지난 지금도 잉크스터는 선수들 사이에 닮고 싶은 선수 1순위로 꼽힌다. LPGA 투어 롯데 챔피언십에 참가하고 있는 이소영(18·안양여고 3)은 “잉크스터처럼 오랫동안 좋은 골프 선수로 활약하고 싶다. 같이 라운드를 해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잉크스터가 선수들의 롤모델이 된 이유는 두 딸을 기르면서도 훌륭한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80년 결혼했고, 10년 뒤 첫째 딸 헤일리를 낳은 이후에도 투어 생활을 멈추지 않았다. 4년 뒤 둘째 코리를 출산하고도 잉크스터의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자매를 키우면서 메이저 4승을 포함해 16승을 추가했다. 엄마가 되기 전 15승보다 더 많은 승수를 거뒀고, 99년에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며 ‘수퍼 맘’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으면 여자 프로골퍼는 ‘두 개의 풀타임’ 직업을 갖게 된다. 투어 생활뿐 아니라 가정과 육아의 밸런스를 맞추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잉크스터는 두 역할을 완벽하게 해낸 것이다. ‘골프 여제’ 안니카 소렌스탐(45·스웨덴)조차도 아이를 출산한 뒤엔 우승한 적이 없다.

 잉크스터 이후 주부 골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간 선수는 많지 않다. 잉크스터는 “프로 골퍼와 엄마로서 밸런스를 맞추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아이를 낳게 되면 몸도 달라져 예전 같은 성적을 내기는 정말 어렵다”고 말했다.

 그래서 여자 골퍼들은 결혼을 미루는 게 일반적이다. 결혼을 한다고 해도 출산의 두려움이 상당히 컸다. LPGA 투어 진출 1세대인 장정과 한희원(37)도 주부 골퍼로 활동했지만 어려움을 호소하며 결국 지난해 은퇴했다. 결혼과 출산은 프로골퍼에게 독으로 인식됐다.

박인비는 2011년 남기협(왼쪽) 코치와 약혼한 후 이듬해부터 대회에 함께 참가하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 해 10월 결혼에 골인했다. [중앙포토]

박인비, 약혼자와 함께 대회장 누벼
최근 이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박인비(27·KB금융)가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2011년 8월 남기협(34)씨와 약혼한 박인비는 이듬해부터 연인과 함께 대회에 참가했다. 박인비는 “결혼도 안 했는데 약혼자와 같이 다닌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신경이 쓰이고 숨겨야 될 것도 많았다. 하지만 행복해지고 즐겁게 골프를 할 수 있다면 굳이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행복해지기 위해 남들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약혼자와 같이 다니기로 결정했다”고 고백했다.

 눈총을 받았던 커플의 투어 생활이었지만 박인비는 2012년 부활을 알리더니 2013년에는 메이저 3연승을 달성하면서 세계랭킹 1위로 우뚝 섰다. 2008년 US 여자오픈 우승 후 부진의 늪에 빠졌던 박인비는 약혼자 남씨를 만난 뒤 슬럼프에서 벗어났다. 연인과 함께 다닌 뒤 전성기를 맞는 등 시너지 효과를 내자 동료들은 부러움에 찬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2014년 10월 결혼한 박인비는 올해 ‘주부 선수’로서 첫 시즌을 맞았다. 리디아 고(17·뉴질랜드)에게 세계랭킹 1위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지난 3월 HSBC 위민스 챔피언스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등 변함없는 샷을 보여주고 있다. 박인비는 “100% 내 편이 있다는 게 큰 힘이 된다. 경기가 안 풀리면 신랑이 장난을 치는데 기분 전환이 된다”며 결혼의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 설명했다. 골프는 외로움과의 싸움인데 하나보다 둘일 때 더 잘 이겨낼 수 있다는 게 박인비의 생각이다. 박인비는 “결혼을 하면 안정감을 느낀다. 확실한 상대가 있으면 결혼을 서두르라고 동료들에게 권한다”고 말했다.

크리스티 커와 그의 가족들. [사진 골프위크]

크리스티 커, 아들 얻고 22개월 만에 우승
크리스티 커(38·미국)는 대리모를 통해 가진 아들을 키우면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지난 3월 KIA클래식에서 20언더파로 우승한 커는 한국계 선수의 개막 7연승을 저지하며 미국의 자존심을 지켰다. 2013년 12월 아들 메이슨 커 스티븐스를 얻고서도 2013년 5월 킹스밀 챔피언십 우승 이후 22개월 만에 LPGA 투어 정상에 다시 섰다. 커는 “4년 동안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다가 고민 끝에 대리모를 결정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경험이다.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80대 타수를 기록한 후 집에 돌아와서도 아이가 밥을 달라고 하면 경기는 금세 잊게 된다”고 말했다. 만약 아이가 없었더라면 커는 집에 돌아와서 그날 망쳤던 경기를 되돌아보며 자책을 했을 지도 모른다. 커는 엄마가 되고 난 뒤 여전사 같았던 다혈질적인 면모도 수그러들었고, 한층 여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브리타니 린시컴(30·미국)도 드월드 고어스(28·미국)와 약혼한 뒤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린시컴은 지난 6일 시즌 첫 메이저 대회인 ANA 인스퍼레이션에서 정상에 서면서 2011년 8월부터 이어져 온 우승 가뭄에서 탈출했다. 지난 시즌 LPGA 투어 장타왕에 오른 린시컴은 지난해 12월 청혼을 한 약혼자 고어스와 함께 포피의 연못에 뛰어 들며 통산 두 번째 메이저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장타 대회에 전문적으로 참가하는 고어스는 드라이브 샷 거리가 464야드에 달하는 장타 전문 선수다.

 폴라 크리머(29·미국)도 지난해 결혼 후 변함없는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선수 중에는 서희경(29·하이트)이 출산을 한 뒤 투어로 돌아왔다. 서희경은 “아이를 낳기 전보다 훨씬 여유가 많아졌다. 과거와 달리 성적이 좋지 않아도 투어 생활 자체를 즐긴다”고 말했다. 올해 LPGA 투어 루키가 된 요코미네 사쿠라(30·일본)도 지난해 멘털 트레이너인 연인과 결혼한 뒤 투어에 함께 참가하고 있는 주부 선수다.

 임경빈 JTBC골프 해설위원은 “여자프로골퍼들은 1년 내내 홀로 투어 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의지할 사람이 생기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예전에는 남녀교제를 숨겼지만 요즘에는 공개 데이트를 하면서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는 골퍼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두용 기자 enjoygolf@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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