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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12일간의 국정 공백 … 국민은 참담하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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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근혜 대통령이 이완구 국무총리의 거취 문제를 매듭짓지 않은 채 중남미 4개국 순방길에 오름으로써 ‘성완종 리스트’를 둘러싼 국정 공백과 정국 혼란이 장기화할 조짐이다. 당장 새정치민주연합이 어제 “이 총리가 사퇴하지 않으면 총리 해임 권고안을 내겠다”고 압박 했다.

 문제는 새누리당에서도 총리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데다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12일간이나 나라를 비운 상황이란 데 있다. 대통령 부재 시 국정운영을 통할해야 할 총리에 대해 국민과 여야 정치권이 등을 돌리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사실상 ‘시한부 총리’에 다름없는 이 총리의 처신이다. 이 총리는 어제 총리 집무실에 나와 “대통령이 계실 때보다 더 열심히 국정을 챙기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총리실은 내일 4·19 혁명기념식에 이 총리가 참석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행여 이 총리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 의혹을 희석시키려는 생각을 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순방에서 돌아온 뒤 (이 총리 거취를) 결정하겠다”는 어정쩡한 입장만 남기고 순방을 떠난 대통령이나 사퇴를 요구하는 여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 웨이’를 외치는 정부 2인자의 모습을 보는 국민의 심경은 참담하다.

 이런 상황은 이미 예견됐다. 정치권과 국민은 수사의 장기화와 대통령의 장기 부재가 뒤얽혀 국정 혼선과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염려해온 게 사실이다. 예정에 없던 박 대통령과 김무성 대표의 그제 회동에 기대를 걸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알맹이 없는 회동은 국민에게 더 큰 실망만 안겨줬을 뿐이다. “이러려면 뭣하러 출국 비행시간까지 늦춰가며 여당 대표를 만난 것이냐”는 야유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통령이 과연 전·현직 비서실장과 정권 실세들이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번 사태의 본질을 간파하고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는 건지, ‘리스트 정국’에 분노하는 국민의 심경을 헤아리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마저 든다.

 박 대통령의 출국 전 동선과 일정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고 있다. 집권당 대표와의 만남을 불과 3시간 전에 부랴부랴 통보한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박 대통령은 김 대표에게 “공무원연금 개혁이 4월 국회에서 차질 없이 처리되도록 해 달라”고 당부했다는데, 그게 그렇게 중요했다면 굳이 출국 몇 시간 전에 비행시간을 변경할 게 아니라 시간 여유를 갖고 대화할 시간을 냈어야 마땅하다. 대통령의 장기 부재, 피의자로 수사를 받는 총리, 야당까지 겨누고 있는 어지러운 ‘리스트 정국’의 와중에서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공무원연금 개혁이 처리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인지 묻고 싶다. 어지러운 정국을 풀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