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칼럼

6자회담 위협하는 한·미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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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조짐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미국이 북한을 자극할까봐 가슴 졸이는 청와대와 외교통상부와 통일부의 코앞에서 북한을 범죄정권이라고 공격했다. 부시의 악의 축(2002)~라이스 국무장관의 폭정의 전초기지(2005)~버시바우의 범죄정권의 계보가 마침내 완결된 것이다. 세련된 외교관의 발언은 듣는 사람의 머리가 돌 정도로 정교하고 계산이 치밀하다. 버시바우 대사의 발언도 예외가 아니다. 비유를 하자면 악의 축과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이 북한의 등을 때리고 엉덩이를 걷어차는 정도의 아픔을 주는 것이었다면 범죄정권이라는 표현은 북한의 가슴에 예리한 칼을 꽂는 행위다.

악의 축과 폭정의 전초기지는 정치적인 비난이다. 그리고 그때는 공범국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버시바우 대사는 북한을 마약을 밀매하고 남의 나라 화폐를 위조하는 파렴치한 정권으로 성격을 규정했다. 공범자도 없다. 정치범과 파렴치범의 차이는 크다. 버시바우 대사는 북한을 범죄국가라고 하지 않고 범죄정권이라고 불러 국가(국민)와 정권을 구분했다. 파렴치한 범죄자는 국민을 포함한 북한이라는 나라가 아니라 정권을 잡고 있는 김정일 일당이라는 점을 확실히 한 것이다. 북한 정권교체론과 같은 코드의 말이다.

6자회담의 앞날이 걱정이다. 버시바우 대사는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는 북한과 협상할 대상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그게 부시 정부의 공식입장이라면 북한은 6자회담에서 앞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금융을 포함한 경제제재의 해제는 북한이 정당하게 기대하는 핵 포기 대가의 큰 몫이다. 북한 핵 포기의 절차가 어느 단계에 이르면 북한과 미국이 협상해야 하는 문제다. '어느 단계 이전'에 금융제재를 해제하라는 북한의 요구는 부당하다. 마찬가지로 금융제재 해제는 협상대상이 아니라고 미리 선을 긋는 것도 핵문제를 해결하자는 성실한 태도가 아니다.

북한이 변하면 미국이 상응한 조치를 취한다는 버시바우 대사의 말도 틀렸다. 상응 조치를 포함한 각종 인센티브(유인책)로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자는 것이 6자회담의 뜻이다. 버시바우 대사는 부시 대통령과 대부분의 네오콘(신보수파)들처럼 "북한을 변화시킨다"는 목표를 "북한이 먼저 변하라"는 전제조건으로 삼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북한이 스스로 변한다면 6자회담은 필요도 없다.

한국 외교팀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부쩍 의심이 든다. 미국이 대화로 핵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있다는 확신은 있는가. 미국 대사가 북한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면 북한이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여 6자회담에 먹구름이 덮인다. 그런 발언이 나온 뒤에 외교부가 나서서 북한을 자극할 발언을 삼가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공자 말씀을 하는 것은 외교가 아니다. 그건 소방외교요, 조건반사의 단세포 외교다. 일본도 북한 인권대사를 임명했다. 한.미, 한.일 공조가 난조다. 이래 가지고 핵협상이고 남북협력이고 제대로 되겠는가.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한.일 관계의 이런 현실을 보고도 한국 외교가 업적을 초과달성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