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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사이트 '무차별 유혹'… 네티즌 54% "접속해 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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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5월 온라인 도박 혐의로 구속된 회사원 이모(36)씨는 재미 삼아 시작했던 온라인 도박 때문에 직장을 잃었다. 이씨는 처음에는 개인 신용카드로 도박하다가 신용카드 한도를 넘기게 되자 회사 법인 신용카드에 손을 댔다. 이씨는 결국 법인카드로만 2300만원을 날렸다. 은행원 김모씨는 지난해 9월부터 5월까지 온라인 도박 사이트에서 1000만원을 날렸다. 김씨는 업무 시간에도 도박 사이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몰래 도박 사이트에 접속하기도 했다. 이들은 경찰에서 "처음에는 무료 제공되는 온라인 고스톱 게임을 즐기다가 현금이 오가는 불법 도박 사이트로 빠져들면서 낭패를 봤다"고 털어놓았다.

◆ 온라인 도박 사이트 급증=불법 도박 사이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불법 도박 혐의로 검찰 또는 경찰에 수사 의뢰한 사이트만 지난해 32건에서 올 들어 11월 말 현재 60개를 기록했다. 이와 함께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도박 관련 메뉴를 삭제해줄 것을 요구한 사이트는 지난해 6개에서 올 들어 8월 말 현재 33건으로 증가했다. 한국 네티즌을 겨냥한 해외 도박 사이트도 지난해보다 크게 늘었다. 정보통신부가 접속을 차단하고 있는 해외 도박 사이트는 지난해 96건이었으나 10월 말 현재 163건을 기록했다. 이들 사이트는 서버를 해외에 두고 있지만, 한글이 지원돼 국내 이용자가 아무 불편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온라인 도박 중독 문제도 심각하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이 지난해 말 경상대 심리학과 이민규 교수와 충남대 김교헌 교수에게 의뢰해 국내 최초로 실시한 온라인 도박 중독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이 교수와 김 교수는 1742명을 대상으로 합법 또는 불법 도박 사이트 이용 경험을 물었다. 조사 결과 54%(947명)가 도박 사이트에 접속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이 중 165명은 매주 네 차례 이상 온라인 도박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매주 네 차례 이상 도박 사이트를 이용하는 사람 중 73명은 도박 중독 위험이 있고, 45명은 이미 온라인 도박에 중독된 것으로 분석됐다.

이민규 교수는 "도박 중독 정도를 판별하는 기준(NODS)에 따라 중독자와 중독위험자를 가려냈다"며 "NODS 조사에서 중독 또는 중독위험으로 나온 사람은 대부분 불법 도박 사이트에서 현금거래를 한 것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NODS 조사의 질문 항목 대부분이 현금을 잃은 경험과 본전을 회수하기 위해 애쓴 경험이 있는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 온라인 도박 규모 확대=올 들어 검찰과 경찰에 적발되는 온라인 도박 사건의 규모는 종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5월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신용카드를 이용해 50개 해외 도박 사이트에서 상습적으로 도박을 한 1만3000명을 적발했다. 이 중 도박 규모가 큰 33명은 입건됐다. 최근에는 경찰 사이버수사팀장이 몰래 도박 사이트를 운영한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 경찰관이 운영한 D도박 사이트를 수사한 대구지검 상주지청 박인우 검사는 "D사이트에서 500만원 이상을 날린 사람만 수백 명에 달해 입건 대상자를 가려내는 게 힘들 정도"라고 밝혔다.

불법 도박 사이트를 모니터하고 있는 영상물등급위원회 관계자는 "연간 1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불법 도박 사이트도 있다"며 "이런 사이트는 불법 도박 혐의로 형사처벌을 받아도 몰래 영업을 하기까지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온라인 도박 혐의로 형사처벌을 받아봤자, 벌금형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보통신부는 9월 벌금형을 받은 상태에서 영업을 계속한 18개 사이트를 강제 폐쇄했다.

◆ 단속 어려워=현장이 없는 사이버 세계에서 온라인 도박이 벌어지는 바람에 수사기관의 단속이 어렵다. 또 온라인 도박 사이트 중 상당수가 도박이 합법화돼 있는 버뮤다와 지브롤터, 바하마 등에 서버를 두고 있어 국내 수사기관의 사법권이 미치지 못한다. 신용카드와 휴대전화 소액결제, 무통장입금 등을 통해 쉽게 도박대금을 송금할 수 있고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컴퓨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도박할 수 있는 점도 온라인 도박을 단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희성.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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