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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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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핫자이(태국)=전종구특파원】
그녀의 일생은 기구한 인생유전이었다. 지난 9일 태국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와 『잃어버린 내 조국을 찾아달라』고 절규하던 노수복할머니(63).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 정신대로 끌려간지 42년만에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노할머니는 이미 한국말조차 깡그리 잊어버린 채였다. 본사는 싱가포르주재 전종구특파원을 노할머니가 살고있는 태국의 핫차이시로 급파, 강탈당한 과거를 되찾기위해 몸부림치는 정신대 할머니의 일생을 들어보았다. 노할머니의 일생은 어떠했으며 여기서 우리가 배울수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3일동안 노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들어본 그녀의 과거를 시리즈로 엮는다.
『코픈 코픈』
『심신마시다, 심신마시다.』
42년전 21세의 꽃다운 나이로 일본군정신대로 끌려나가 갖은 수모를 겪으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역사의 희생자 노수복 할머니(63)―.
일본의 한반도침략야욕과 갖가지 만행의 제물이 됐던 노할머니는 기자가 태국의 벽촌 열대지대 핫차이로 찾아갔을때 반세기만에 고국에서 온 동포를 만나 『매우 반갑다』는 우리말 대신 태국말로 연신 『코픈』이라고 외치다 목이 멘채 기자의 두 어깨가 얼얼할 만큼 힘껏 부둥켜 안았다.
태국수도 방콕에서 남서폭으로 1천km. 비행기로 2시간 거리인 말레이지아 국경쪽 후양도시 핫차이는 열대 수림과 짙푸른 열대 대양의 이국적 풍취가 과거의 쓰라렸던 기억을 잊기에 안성마춤으로 평화스럽고 아름다왔다.
핫차이는 인구 30만명의 소도시로 중국계가 4만명으로 이들 화교가 거의 상권을 쥐고있는도시다.
방콕에서 송클라로 가는 태국 국내선비행기 안에서 사귄 태국인 「찬·반·초메트」씨의도움과 노할머니를 잘 안다는 핫차이에서 만난 「앤멘」씨가 승용차 편의를 제공해 시내 중심가에 있는 노할머니의 집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노할머니가 사는 집은 대지 1백여평에 건평 2백여평, 싯가 1백만 바트(4천만원)의 새로 지은 3층주택으로 한눈에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임을 알수 있었다.
지난 9일 처음으로 방콕의 한국대사관을 방문해 가족을 찾아 달라며 『나 광산 노가, 노수복이 고향은 안동군풍천면광덕리 안심이고 아버지는 노백봉, 남동생이 노수만, 여동생이 노순음』 이라고 부르짖던 이 할머니는 이곳 핫차이에서는 사뭇 다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현주소 「태국 송클라주 핫차이시 니파트 우티트3」
△출생지 「중국 복건성 포전」
△이름 「유유타」(여옥타)
△생년월일 「1921년8월15일」
지난해 동남아 관광여행을 하면서 남편인 화교「첸·차오」씨(72)가 방콕주재 중공대사관에서 발급받은 여권에 기재된 내용이다.
『내 생일은 원래 8월15일이 아니었지요. 일본군 막사에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또갖가지 수모와 고통과 설움을 겪으며 기다리던 것이 조국해방이었어요. 해방이 되고 몸이 자유롭게 풀리면서 태국 정부에 호적신고를 했지요. 이때 해방의 날을 내 생일로 정했어요.』
노할머니는 조국과 함께 다시 살아난 인생을 자신의 생일로 기념한다면서 어느새 목소리가 떨리며 이미 주름살이 잡힌 눈시울에 물방울이 맺혔다.
방콕 한국대사관에서 만났던 박상균영사가 『노씨와 첫대면 했을 때 뜨거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고 한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노할머니와의 대화는 우리말을 거의 잊어 할수 없이 동행했던 태국인 「찬」씨와 노할머니의 질녀「우사」양이 영어로 통역을 맡아 가능했다.
푸른색상의 재킷에 검정색 중국여인 바지차림의 노할머니는 첫대면에서 가진 2시간동안의 대화에서 말이 흐트러지고 중간중간에 끊기면서도 눈빛으로, 몸짓으로 서로 의사를 전달하기가 여러번이었다.
얘기가 고향얘기로 돌아가자 띄엄띄엄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느라 고개를 몇번이나 갸웃거리던 노씨는 처녀적에 살던 고향마을은 봄이되면 낮은 뒷동산에 진달래꽃이 불타오르듯 피어났고 마을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 그림처럼 아름다왔다고 말했다.
노할머니집 거실은 18인치 흑백TV 1대와 냉장고, 그리고 낡아 보이는 안락의자가 전부였으나 벽면의 태국제 목각 기마상옆에 태극이 선명한 페넌트형 태극기가 눈길을 끌었다.
방콕에서 간호원으로 있는 질녀가 지난해 일본·한국을 방문하고 귀국하면서 선물로 가져다 준 것이라 했다.
다음날 아침 시내 노라호텔로 찾아온 노할머니의 조카「키자」씨가 태워준 오토바이로 노할머니가 경영하는 음식점「대취다실」로 다시 찾아갔다.
이 음식점은 원형식탁 6개가 놓인 자그마한 식당으로 새끼손가락 크기의 도너츠 같은 기름에 튀긴 밀가루 떡과 코피, 또는 중국차를 파는 간이음식점이다.
밀가루떡 2개에 1바트(40원), 코피한잔에 3바트(1백20원)의 싼 음식이였으나 장사가 잘돼 하루 매상액이 줄잡아 4천바트(16만원)까지 오르는 실속있는 음식점이었다.
대취다실은 노할머니와 남편「첸·차오」씨, 큰아들「스폿」씨(23)가 직접 밀가루떡을 만들고 손님을 접대하는 가족경영으로 가끔 둘째아들「주밍」군도 나와 온가족이 즐겁게 일한다고 했다.
이날 상오 기자를 다시 만난 노할머니는 경상도사투리의 억센 억양으로 『밥묵으라』며 반갑게 맞았다(아침먹었느냐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기자가 『안녕하세요』『반갑습니다』등의 우리말을 한글로 적어가며 가르치자 노할머니는 『조센 사람이 와까리마시다』(한국말을 좀 알겠다는 뜻인듯)라면서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노할머니는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며 흥이 날때면 아리랑·도라지 타령을 흥얼거리다가도 이내 한숨과 눈물을 짓곤했다.
노할머니는 기자가 핫차이를 떠날 때 그동안 눈물로 얼룩졌던 표정을 감추고 『정월 이월삼월 사월 오월』을 손가락으로 꼽아보이며 『5월에는 나도(서울)가』라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다음은 노할머니가 밝힌 자신의 기구한 지난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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