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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어떤 자식이 부모와 매일 놀아줄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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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호 30면

딱히 효녀가 아니기 때문일까. ‘효(孝)’를 팔아야만 했던 ‘약장수’라는 이야기에 움찔했던 까닭은.

영화 ‘약장수’

“세상 어떤 자식이 지 엄마랑 매일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 하루 4시간씩 놀아줘?”라는 건강식품홍보관 점장 철종(박철민)의 속사포 지적을 듣곤 뜨끔했다. 그가 지칭한 ‘무식한 기자 새끼들’처럼 나 역시 순진한 노인들에게 싸구려 물품을 비싸게 팔아대는 일당에 대한 기사를 썼지만, 그들이 왜 홍보관에 갈 수밖에 없었는지는 주목하지 않았던 탓이다.

처음 홍보관을 찾았던 일범(김인권)의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픈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었지만 특별한 기술도 없는 신용불량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어르신들 등쳐먹는다는 생각에 온 길을 되돌아가기도 했지만 약값이라도 손에 쥐려면 어쩔 수 없었다. 자존심은 애시당초 바닥에 내려놔야 했고, 누구에게나 살갑게 ‘엄마’라고 칭하며 안길 수 있는 사교성은 필수. 거기에 구성진 노랫가락과 흥겨운 춤사위는 최상의 옵션이다. 흥이라도 나고 한 번이라도 더 웃어야 지갑이 열릴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는 엄마들 역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다. 평소에는 살랑살랑 웃는 얼굴로 식용유며 휴지 등을 챙겨주지만, 때가 되면 값비싼 샴푸며 건강식품을 안기고 수금이 제때 이뤄지지 않으면 그 어떤 사람보다 잔혹한 얼굴로 변한다는 사실을 몰라서 발길을 끊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여기가 아니면 매일 출근도장을 찍어도 반갑게 맞아주고, 함께 도시락을 까먹고 희희낙락 웃을 수 있는 공간이 마땅치 않은 탓이다.

옥님(이주실)처럼 성공한 자녀를 둔 엄마들은 더욱 그랬다. 아들 내외는 모두 잘나가는 검사지만 나랏일 한답시고 부모랑 밥 한 끼 먹어줄 시간은 없다. ‘자랑스러운 어머니’ 상을 받아도 승진에 도움이 된다는 계산만 앞서지, 오면 내주려고 아껴둔 과일이 문드러지도록 발길은 뜸하다.

그런 옥님에게 친구 따라간 홍보관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아들보다 살가운 일범은 생일이면 미역을 사들고 옥님의 집을 찾았고, 아픈 그를 위해 단독 위문 공연도 서슴지 않았다. 옥님은 일범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손을 들어 그를 구원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무지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닌 외로움과 보상이 빚은 모종의 거래였던 셈이다.

놀라운 것은 홍보관을 가득 메운 엄마가 보조출연자가 아닌 진짜 우리네 엄마들이란 사실이다. 조치언 감독은 “인천에서 실제 홍보관으로 사용되는 장소를 빌려 촬영했는데 그곳에 오시던 어머님께 부탁드리니 100여 분씩 모아오셨다”며 “너무 젊은 것 아니냐고 하는 분도 있는데 평균 65세로 일부러 예쁘게들 차려입고 오신다”고 말했다.

직원들의 사소한 농담에도 자지러지게 웃고, 소녀 같은 생기를 되찾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안 바쁠 때 2시간만 에미랑 안 놀아줄래? 팁도 줄게”란 옥님의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진짜 아들이 이들을 가리켜 ‘가짜 효도’라고 욕할 수 있을까.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모를 이 상황에서 말이다.

하루 평균 4.7명의 노인이 고독사한다는 뉴스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극은 중심을 잃고 흩어진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따라온 감정이 갈 곳 없이 부유하게 되는 탓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신예 감독을 그저 힐난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작금의 현실이 자꾸만 우리를 지치게 하고 분노케 하니 말이다. 지난해 휴먼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선보인 대명문화공장이 두 번째 작품 역시 노인의 이야기를 택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일 터다.

영화는 삐에로마냥 분칠을 하고 기묘한 표정으로 춤을 추는 일범의 모습으로 끝난다. 잔상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애꿎은 질문만 던지게 된다. 과연 나는 좋은 자식일까, 나 역시 잠재적 가해자는 아닐까. 배우 김인권은 “‘어벤져스’는 현실을 잊게 해주는 영화지만 ‘약장수’는 삶을 되돌아보고 삶이 새롭게 느껴지도록 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이 참에 그냥 엄마랑 2시간만 같이 놀아볼까나. 23일 개봉.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대명문화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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