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저성장과 디플레, 한국 경제의 병이 깊어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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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국은행이 한 해 발표하는 경제통계는 131건(2015년 기준)이다. 휴일을 빼면 이틀에 한 번꼴로 새 숫자들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단순 집계 자료도 있지만 해석이 필요한 통계도 많다. 이런 숫자들을 위해 전문 인력만 박사급 124명, 석사급 538명이 동원된다. 국내 최대다. 이런 한은의 통계는 경제의 향방을 알려주는 가늠자다. 정부·가계·기업 각 경제 주체들은 한은의 숫자를 밑그림 삼아 경제 계획을 세운다.

 그런 한은이 9일 발표한 ‘2015년 경제 전망’은 두 가지 점에서 참으로 암울하다. 우선 올해도 우리 경제가 크게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예상이 첫째요, 전망치를 몇 차례씩 큰 폭으로 수정하는 한은의 예측 능력이나 경기 대응력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이냐는 게 두 번째다.

 한은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3.1%로 낮췄다. 지난해 4월 4.2%로 잡았다가 7월(4.0%)·10월(3.9%), 올해 1월 3.4%까지 1년 새 네 차례나 전망치를 낮춘 것이다.

경기예측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심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은 더하다. 석 달 만에 1.9%에서 0.9%로 큰 폭으로 끌어내렸다. 유가 하락과 공공요금 인하가 예상보다 컸다는 게 한은의 설명이지만 군색하게 들린다. 과연 이런 한은의 경제예측 능력을 믿고 경제정책을 펴도 되는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요즘처럼 비관적 경기 지표와 희망적 경제 신호들이 엇갈려 나타날 때는 특히 한은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은의 예측 능력이 떨어질수록 한국 경제의 대응 능력도 떨어지게 된다.

 더 걱정스러운 건 암울한 경기 지표들이 좀체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월 제조업 생산은 다시 -4.8%로 후퇴했다. 수출마저 3개월 연속 마이너스다. 증시와 부동산이 살아나고 일용 건설시장이 북적대는 등 바닥 경기가 꿈틀대고는 있지만 본격 경기회복을 말할 정도는 아니라는 분석이 많다. 일각에선 한은이 다소 낙관적인 전망을 해온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한은이 올 성장률 전망을 2%대로 낮췄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노무라증권(2.5%)·BNP파리바(2.7%)·IHS이코노믹스(2.9%)는 이미 한국의 성장률 전망을 2%대로 낮췄다.

 무엇보다 큰 걱정은 이런 저성장 기조가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회견에서 “경기회복을 위해 재정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해줘야 한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정부의 고민도 깊어지게 됐다. 기획재정부는 성장률 3.8%, 물가 상승률 1.9%를 전제로 올해 예산을 짰다. 큰 폭의 세수 차질이 예상되는 만큼 경제운용계획도 대폭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런데도 청와대 경제수석과 경제부총리는 “경기회복세가 강화되고 있다”며 현실과 동떨어진 낙관론을 늘어놓아 혼란만 키우고 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더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다. 한은은 ‘디플레이션은 아니다’란 말만 되풀이하지 말고 경제의 추세 변화를 면밀히 따져야 한다.

정부는 어설픈 낙관론보다 과감한 구조개혁으로 경제체질 강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지부진한 노동시장 개혁이나 공무원연금 개혁이 그 출발점이 돼야 한다. 특단의 각오와 실천 없이는 저성장과 디플레라는 중병에 빠진 한국 경제를 구해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