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충격의 '성완종 리스트' 끝까지 밝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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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기춘·허태열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거액을 건넸다고 폭로한 건 충격적이다. 고인의 점퍼 주머니에선 김·허 전 실장을 포함한 정권 실세 8명의 실명과 금액이 적힌 메모도 발견됐다. 검찰 수사 중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점도 석연치 않거니와 죽음을 눈앞에 둔 고인이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를 폭로한 배경에 국민적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충격적인 사태를 맞아 정부는 공소시효 운운하며 소극적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드러난 의혹은 한 점도 남김없이 모두 가려낸다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한 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성 전 회장은 여야를 넘나들며 정치권에 폭넓은 인맥을 갖고 있는 기업인 출신 정치인이다. 정권의 속성과 정치권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 성 전 회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2007년 경선 때 리베라호텔에서 허태열 전 실장(당시 박근혜 캠프 직능총괄본부장)을 만나 서너 차례에 걸쳐 현금 7억원을 줬다. 그것으로 경선을 치른 것”이라고 말한 건 의미심장하다. 또 김기춘 전 실장에 대해선 “2006년 VIP(박 대통령 지칭)를 모시고 벨기에·독일 가게 돼서 10만 달러를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줬다”는 말도 했다. 성 전 회장의 점퍼 주머니에서 발견된 메모엔 이 밖에도 2006년 9월 26일이라는 날짜까지 적혀 있다. 당사자들이 일제히 “황당무계한 얘기이자 악의적인 소설”(김 전 실장)이라거나 “그런 금품거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허 전 실장)이라며 의혹을 부인하고 있지만 이들을 의식해 수사를 주저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성 전 회장이 사망한 상태여서 수사의 어려움이 예상되기는 하나 돈을 건넨 장소와 금액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데다 수행비서가 돈 심부름을 했다고 증언한 상태다. 그런 만큼 검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해 관련자들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현행법상 정치자금법 위반 행위의 공소시효(7년)는 지났지만 뇌물죄(공소시효 10년)로는 사법처리가 가능하다. 메모에 뇌물 액수까지 적혀 있는 유정복 인천시장(3억원),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2억원), 홍준표 경남지사(1억원), 부산시장(2억원)은 물론 이름만 적혀 있는 이완구 총리,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해서도 철저한 수사가 이뤄져야 한다.

 전·현직 비서실장, 국무총리, 친박 실세들이 등장하는 이번 사건을 대하는 청와대와 여권의 대응은 극히 실망스럽다. 근거 없는 의혹의 확산을 우려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하루 종일 우왕좌왕할 뿐 이렇다 할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성 전 회장이 구명 요청을 거절당하자 혼자 당할 수 없다는 심정에서 한 근거 없는 주장 아니겠느냐”는 하소연만 들릴 뿐이다. 새누리당 지도부 역시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의 공식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는 모호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번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인사들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과 2012년 대선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정권 실세들이다. 결과에 따라선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수행 리더십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두 사람이 왜 비서실장이 됐는지 알겠다”고 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말이 아니더라도 온 국민의 의혹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사안인 것이다.

 물론 성 전 회장이 김 전 실장에 대해 "당시는 야인(野人)으로 놀고 계셨다”고 말했지만 당시 김 전 실장은 3선의 현역 의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성 전 회장의 진술을 온전히 믿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철저하고도 조속한 진상 규명이 급선무다. 여권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난 연말 정윤회 문건유출 사건 때나 세월호 침몰 사건 당시 초동단계 대처에 실패해 불필요한 비용을 치렀던 교훈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을 법리(法理)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 국민에 대한 신뢰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