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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법 때문에 아빠 잃는 미혼부 아이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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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박진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지난 1월 한 미혼부가 서울 난곡동 베이비박스에 아이를 맡기며 남긴 편지. [사진 주사랑공동체교회]
박진호
사회부문 기자

“대한민국에서 미혼부가 아기를 키우는 건 정말 불가능에 가깝더군요. 출생신고만 돼도 이렇지 않았을 텐데… 당장 몇 시간 뒤 출근해야 하는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 1월 10일 새벽 서울 난곡동 주사랑공동체교회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넣고 간 미혼부가 남긴 편지다. 이 교회 정영란 전도사는 “매달 4~5명의 아이가 미혼부들에 의해 맡겨지고 있다”고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전국의 미혼부는 1만8118명. 2005년 9218명보다 두 배가량 증가한 것이다. 지금은 2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중 상당수가 법에 가로막혀 아이의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가족관계등록법 46조 2항 ‘혼인 외 출생자의 신고는 모(母)가 하여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다. 김모(38)씨도 딸 봄이의 출생신고를 하기까지 15개월이 걸렸다. <중앙일보 4월 6일자 14면>

 김씨는 우선 봄이에게 자신과 같은 성(姓)과 본(本)을 만들어 주기 위해 성본(姓本)의 창설허가심판청구를 법원에 했다. 갓난아이가 청구할 수 없어 김씨가 특별대리인으로 나섰다. 하지만 친족관계에서나 가능한 특별대리인이 되기 위해선 DNA 검사 결과를 제출해야 했다. 성본 창설허가가 나오자 이번엔 봄이의 가족관계등록부 창설을 허가해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그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난 게 아니었다. 김씨는 다시 구청에 ‘봄이가 내 딸이 맞음을 인정해달라’고 인지(認知) 신청을 했다. 이 신청이 받아들여진 뒤에야 김씨는 봄이와 함께 가족관계등록부에 오를 수 있었다.

 크게 보면 서너 단계지만 그 과정에서 봄이가 다른 가족관계등록부에 오른 사실이 없다는 증명서를 발급받는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김씨 사례는 미혼부가 법적으로 아빠임을 인정받기가 얼마나 힘들고 까다로운지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이런 절차들을 밟으러 다니다 보면 일을 할 엄두를 낼 수가 없다.

 전문가들은 DNA 검사만으로 가족관계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도 미혼부에게만 복잡한 법적 절차를 강요하는 건 비합리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상용 중앙대 교수는 “현행 출생신고제를 출생등록제로 바꿔 아이가 태어나면 병원에서 의무적으로 출생을 등록하게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출생신고 절차를 밟는 동안 아기가 건강보험의 울타리 밖에 방치된다는 점이다. 실제 김씨는 딸 봄이가 2주간 병원에 있는 동안 700만원의 치료비를 내야 했다. 김씨는 “출생신고 과정에서 봄이가 또 병원에 갈까 가장 두려웠다”고 했다. 복지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시대 변화에 맞게 법 절차만 간소화해도 아이를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건져낼 수 있다.

박진호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