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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AIIB에 늑장 가입한 한국이 주도권 찾으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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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주명건
세종연구원 이사장

한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여가 기정사실화돼 가고 있다. 신청서를 제출한 나라는 총 51개국으로 미국과 캐나다,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제대국이 참여했다. 한국은 그동안 찬반 양측의 압력을 받아 주저하다가 유리하게 참여할 기회는 잃었지만 AIIB와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충돌 없이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개혁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일본은 1966년 미국과 함께 ADB 설립을 주도했다. 당시 일본의 지분율은 21.1%였지만 93년에는 50%까지 늘어났고, 이를 근거로 지난 50여 년간 총재직을 맡아 왔다. 중국의 부상에 따라 일본의 지분은 15.7%로 축소됐지만 중국의 지분(홍콩 포함)은 여전히 7%로 제한되고 있다. 중국이 AIIB 설립을 추진하는 것은 이 같은 일본의 독주에 대한 불만도 한몫했다는 견해가 많다.

 한국은 역내 제3위국임에도 불구하고 적기에 가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응분의 지분을 배정받을지는 미지수다. 더욱이 중국이 AIIB를 자국의 의도대로만 운영하려고 한다면 ADB에서 한국이 받는 대접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ADB의 문제는 개선하지 않고 AIIB를 창설하게 되면 양측의 격돌은 더욱 가열돼 지역 내의 금융패권 다툼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적기에 AIIB에 참여한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은 그 위상을 높여 준 대가로 실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한국은 아무런 실익도 없이 반대 측의 신뢰만 잃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AIIB 참여를 계기로 중국이 공정한 지분을 배정하도록 설득하는 동시에 ADB를 비롯한 모든 국제금융기구까지도 공정하게 개혁하는 계기로 만들자는 제안을 할 필요가 있다. ADB는 역외국의 지분이 34.9%에 이르지만 역내국의 지분은 경제 현실과 상관없이 제한하고 있다. 2013년 중국의 지분 조정 요구를 거절한 것이 내부 갈등요인이었다.

 AIIB가 성공하려면 합리적인 지분 배정이 중요하므로 역내외 구분 없이 무역 규모와 국내총생산(GDP)을 각각 50%씩 반영해 5년마다 지분율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무역 규모를 포함시켜야 하는 까닭은 GDP만을 기준으로 하면 정부의 임의계상 요소가 많고 화폐의 명목가치와 구매력의 편차가 커서 경제 현실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에 따라 국력도 수시로 변한다. 예를 들어 17세기 중국은 세계 경제의 55%를 차지했지만 한때 4%대까지 축소됐다가 오늘날 세계 GDP의 12.6%를 차지하고 있다. 필리핀도 50년대에는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컸지만 지금은 5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경제 상황에 따라 지분율을 계속 조정해야만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국제금융기구가 운영될 수 있다.

 이와 함께 미국과 일본의 AIIB 동참을 유도하고 대규모 유상증자로 ADB를 개혁해 두 기구의 지분율을 비슷하게 만들면 원만하게 합병하여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미·중·일의 지분을 평균치로 동일하게 배정해야 중견국들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독주와 충돌을 막을 수 있다.

 한국은 AIIB 참여를 계기로 ADB 지분율 개혁안도 제시함으로써 모든 국제금융기구의 장기적 발전 기틀을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의 운영까지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개선해 사실상 세계중앙은행의 초석을 놓게 될 것이다.

 그동안 IMF와 세계은행은 본연의 설립 목적에서 벗어나 일부 선진국과 국제금융재벌의 이익을 대변해 왔다. 국제금융재벌들은 주기적으로 특정 국가에 유동성을 과잉 공급해 자산거품을 일으킨 후 일시에 자금을 회수하여 국가 도산으로 몰아넣었다. 그 뒤 이자율을 높여 헐값에 핵심 자산을 매입하곤 했다.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도 IMF는 국제금융재벌들이 우량 자산을 헐값에 사들일 수 있도록 압박했다.

 AIIB 설립을 계기로 국제금융기구들이 본연의 목적에 맞게 개선되고 궁극적으로는 세계중앙은행으로 진화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세계적 금융위기를 방지할 수 있고, 세계화폐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대다수 국가의 피해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도 특정국이 자국의 화폐가 세계화폐처럼 쓰이는 것을 이용해 과다하게 화폐 부문을 팽창시켰으나 실물경제가 이를 따라가지 못해 발생한 것이다. 선진국들은 그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도 무제한 양적완화로 각국의 환율전쟁을 심화시켰고, 투기자본이 일시에 빠져나가 신흥국들에 큰 타격을 줬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세계 각국이 저마다 환투기세력의 공격에 대비해 총 12.6조 달러(세계 GDP의 16.7%)나 되는 외화를 보유함으로써 세계 경제를 비효율적으로 만들고 있다.

 AIIB 참가를 계기로 한국은 모든 관계국이 다 함께 번영할 수 있는 궁극적 해결방안을 제안해야 할 것이다. 또한 AIIB 설립을 둘러싼 주요국들의 갈등을 모든 국제금융제도를 개혁할 기회로 반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이 공정한 세계 질서를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주명건 세종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