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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은 어디로 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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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주철환
아주대 교수 문화콘텐츠학

미술관 뒷마당이 통째로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10층. 주거만족도가 10점 만점에 10점이다. 베란다 창문이 커다란 화폭이다. 사계절 풍경화다. 누군가 매일 그림을 바꿔 단다.

 바람은 신의 숨결이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다. 개나리가 행진하더니 어느새 벚꽃이 점령해 버렸다. 점입가경. 그러나 고작 일주일이다.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보내고 벚꽃은 일제히 사라질 것이다. 근심은 없다. 4월은 또 찾아올 테니까. 꽃들은 약속을 지킬 테니까.

  미술관 부근 찻집에서 오래된 제자를 만났다. 얼마 전에 메일을 보낸 친구다. 대학부속병원에 왔다가 무턱대고 연구실까지 찾아온 낭만파. 부재 사실을 알리는 ‘퇴근’ 표시를 보자 왠지 억울해서 문고리를 잡고 두어 번 흔들다가 곧바로 주소 확인하고 메일 보낸 행동파이기도 하다. “원예학과 84학번으로 1학년 때 국어작문을 선생님께 수강하여 C+ 받은 서정남입니다.”

 얼굴은 기억 안 난다. 어색하게 웃으면서 걸어오는 저 ‘아저씨’겠지. 명함을 내민다. 국립종자원에 근무하고 있단다. 전공을 잘 살렸구나. 그가 다니던 원예학과, 이웃해 있던 식물보호학과는 오래전에 없어졌다. 꽃은 없어지지 않는데 꽃을 기르고 보호해 줄 사람들은 이제 키우지 않는구나. 세상이 참 약았다.

 기억이 부활한다. 꽃향기, 커피 향기, 추억의 향기. 시간이 물들어 간다. 듣고 보니 그동안 꽃에 관해 교재도 펴내고 신문에 연재도 오래한 전문가였다. 칼럼 제목이 ‘꽃과의 대화’다. 메일 끝에 “꽃에 대한 글쓰기와 문화콘텐트로서 ‘꽃문화의 가능성’에 대한 보수교육을 받고 싶습니다”고 쓴 게 빈말이 아니었다. ‘교육은 애프터서비스’라는 신념이 굳어지는 순간이다. 오늘은 그에게 A+를 주고 싶다.

 어제는 부활절이자 식목일. 부활절에 성당과 교회에서 왜 하필 삶은 계란을 주느냐는 인터넷 질문에 첫 번째로 올라온 답은 ‘깨질까 봐’다. 김수환 추기경의 유머 한 토막이 떠오른다. 삶이 뭔지 모르겠다며 묻는 사람에게 ‘삶은(Life is) 계란’이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알이 부화해야(깨져야) 생명이 되듯 부활도 깨어야 이룰 수 있다는 말씀으로 다가온다. 마침 광화문에서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예배’가 열렸는데 그 주제가 ‘곁에 머물다’였다. 내 곁에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오늘도 깨어나야겠다.

주철환 아주대 교수 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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