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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득의 행복어사전] 여보, 저 맘에 안 들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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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1호 34면

봄은 유난하다. 어느 해 봄날. 6년을 사귄 남자와 여자는 공원을 산책하다 잠시 벤치에 앉았다. 벚꽃이 한창이었다. 봄은 중력이 가장 약해지는 계절이다. 싹이 중력을 뿌리치고 솟아오른다. 사람도 약해진 중력 때문에 조금만 방심하면 둥실 떠오른다. 마치 달 위를 걷는 사람처럼.

두둥실 떠오른 남자는 여자에게 말한다. 사랑해. 여자도 남자를 따라 떠오른다. 얼마큼? 내 목숨보다 더. 정말? 날 위해 죽을 수 있어요? 그럼. 거짓말. 정말이라니까. 자긴 아닌가 보네. 나도 그래요. 그래? 남자는 너무 높이 떠올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우리 같이 죽을까? 여자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미쳤어요? 그렇지? 그럼 우리 같이 살까? 역시 봄은 중력이 가장 약해지는 계절이다. 그러니까 봄에는 대화도 가벼워지는 법이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다. 같이 죽거나 같이 살고 싶었다. 사랑해서 결혼한 여자와 남자도 가끔 부부싸움을 한다. 유치하고 비열하게. 살면서 알게 된 내부정보를 활용하여 상대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가장 효율적으로 건드린다. 톡. 감정의 연쇄폭발. 서로에 대한 신랄한 비난. 상처 입은 영혼의 한탄과 원망. 그들은 격정적으로 싸웠다. 그렇게 싸운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다투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그것은 그들의 사생활이니까.

아내와 다툰 날 남편은 서재가 있는 방으로 갔다. 보기에 따라서 그것은 자발적인 행보처럼 보였다. 사실 쫓겨난 것이지만. 당연히 아내는 안방을 차지했다. 집의 안주인은 아내다. 집안의 정서적 심리적 공간을 장악하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아내다. 집은 아내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아내는 파업을 선언했다. 이제 나는 당신을 위해 살림을 하지 않겠다. 밥도 하지 않겠다. 그러니 알아서 챙겨 먹어라. 직접 해먹든지 밖에서 사서 먹고 들어오든지 마음대로 해라.

아내는 자신이 먹을 밥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혹시 밥이 남으면 그걸 남편이 챙겨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아내의 섬세한 조치였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집안의 공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꼭 말을 해야 할 때면 아들을 통해서 했다. 철 없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죄로 방자가 된 아들을 통해.

짐승이 사람이 되려면 백일 동안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어야 하지만 사람이 짐승으로 되는 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자지도 못한 남편은 사람꼴이 아니었다. 언제 어떻게 냉전이 끝나고 부부가 말을 나누고 비로소 아내가 차려준 밥을 남편이 먹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안다고 해도 그걸 밝힐 수는 없다. 그것은 그들의 사생활이니까.

봄은 유난하다. 어느 봄날. 25년을 함께 산 여자와 남자는 공원을 산책하다 잠시 벤치에 앉았다. 벚꽃이 한창이다.

아내는 바쇼의 하이쿠를 떠올린다. “우리 둘 생애 / 그 사이에 있다네 / 벚꽃의 생애”

벚꽃의 생애는 짧다. 벚꽃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짧은 우리 생애를 닮아서인지도 모른다. 아내가 말한다. 이번에 알았어요.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남편은 뭔가 들킨 기분이 들었다. 사랑해. 아니, 사랑하지 않아. 옛날엔 당신도 날 사랑한 적이 있었는데. 아내는 벚꽃을 올려다본다. 벚꽃 참 좋다. 내가 앞으로 이 봄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남편은 고령화 사회의 평균수명을 생각해보지만 숙연한 분위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한다. 아내가 한숨을 쉰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죽으면 당신 혼자 제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아. 남편은 어쩐지 억울하다. 나 혼자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

어색한 침묵 사이로 벚꽃이 떨어진다. 당신은 뭐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 밥도 빨래도 청소도. 그냥 내가 죽으면 당신도 같이 죽는 게 좋을 것 같아. 나 밥 잘 해. 청소도 빨래도. 나 정말 괜찮아. 아니, 내가 죽으면 바로 당신도 죽여줄 게. 내가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그래요. 사랑하니까. 나 죽고 난 뒤에 당신 혼자 남아서 살 걸 생각하면 내가 마음이 안 놓이고 가슴이 아파서 그래. 그냥 내가 죽여줄 게.

아무래도 남편은 아내에게 사과해야 할 것 같다. 당신 나 마음에 안 들지?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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