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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강성현]인재를 몰고 다닌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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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 ‘일제의 심장’을 저격하여 세계를 뒤흔든 사건이 중국 대륙에서 일어났다. 라이프치히 대학에 머물던 차이위안페이(1868~1940)는 안중근(1879~1910)의 장거를 접하고 적지 않은 감흥이 일었다.

“아! 열사(烈士)가 나라를 위해 죽으니 호연정기가 흥기하누나. 열사는 당년에 큰 뜻을 품고 북쪽으로 가서, 손가락을 잘라 굳게 맹세하고 비장한 노래를 불렀다. 한 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역수(易水)의 결의’를 다지고, 일격에 수치를 씻었으나 몸은 오히려 죽게 되었다. …침묵 속에 잠겨있는 우리가 애달파 상심으로 이가 갈린다. 아아! 열사여(김삼웅 저,《안중근 평전》, 512쪽)!”

‘역수의 결의’란, 진시황 암살에 나섰다가 불귀의 객이 된 형가(荊軻)의 다짐을 의미한다. 차이위안페이는 안중근 의사를 비운의 자객, 형가에 비유하였다. 혈혈단신으로 거사에 성공한 안 의사를 그가 얼마나 흠모하였는지 위의 글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크게 버리는 자가 크게 얻는다.’고 하였다. 보장된 지위와 부귀영화를 팽개치고, 구국을 위해 신산(辛酸)의 길을 택한 인물이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경쟁률을 뚫고 진사의 반열에 오른 인물, 그리고 미련 없이 '철밥통(鐵飯碗)'을 내던진 인물, 그가 바로 차이위안페이다. 찰즈 허커(Charles Hucker)의《중국문화사》에 의하면, 1800년 무렵 진사 합격 비율은 400만분의 1에 이른다고 하였다.

차이위안페이는 청조가 길러낸 인재로서, 무능한 청조의 ‘목젖’에 칼끝을 겨눈 보기 드문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한림원 관리로 출발하여 혁명가ㆍ언론인ㆍ정치가ㆍ사상가ㆍ교육실천가로서, 시대에 한 획을 그은 걸출한 인물이었다.

‘공자 타도’의 선봉에 나섰던 그에게 아이러니하게도 ‘근대의 공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가 가진 공식 직함은 광복회장, 교육부장관, 북경대학 총장, 중앙연구원장, 국민당 감찰원장, 민권보장동맹 부주석 등을 포함하여 무려 30개 가까이 된다.

‘겸용병포(兼容幷包, 사상의 자유)’를 표방한 차이위안페이는 누구보다도 널리 인재를 구하였다. 인재를 기르고, 발굴하며, 발탁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까오핑수(高平叔)의《차이위안페이 전집(1~4)》, 후궈수(胡國樞)가 지은《차이위안페이 평전, 강성현 역》 등을 근거로, 차이위안페이가 품었던 인재들의 면면을 훑어보고자 한다.

북경대학교 총장 시절 차이위안페이는, 사상과 정파, 학위의 유무, 나이를 초월하여 현자와 유능한 인재를 불러 모았다. 1917~1918년 무렵에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대학으로 몰려들었다. 그가 초빙한 천두슈, 후스, 루쉰 등은 백화문 사용을 주창하였으며, 후에 5ㆍ4 신문화 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군주제 복귀를 외치는 구체제 신봉자, 구훙밍(睾鴻銘)도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포용하였다. 서구식 복장에 단발을 하던 시절, 회색의 변발에 썩은 치아만 몇 개 남은 괴이한 몰골의 구훙밍은 영국문학에 정통하였다. 어학에도 천재적 감각을 지녀 영어, 독일어, 불어, 라틴어에 능통하였다. 그는 영문으로《중국인의 정신(The Spirit of the Chinese People)》을 저술하여 세계인의 주목을 받음과 동시에 중국인의 애국심을 불러 일으켰다.

차이위안페이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청년 화가 쉬베이훙(徐悲鴻)의 천재성에 주목하였고, 그를 곧바로 북경대학 화법연구회 지도 강사로 불러들였다. 일 년 뒤 차이위안페이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으로 쉬베이훙은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훗날 북경 예술학원 원장, 중앙미술학원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중국 미술계의 거목이 되었다.

영국에서 철학ㆍ윤리학 등을 연구한 양창지(楊昌濟)는《신청년》,《동방잡지》등에 서양철학·윤리학·교육학 등을 소개하였으며, 여타 신문화 운동의 기수들과 마찬가지로 민주· 과학을 적극 제창하였다.

양창지도 차이위안페이의 부름을 받아 고향 호남성을 떠나 북경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그의 제자이자, 후에 사위가 됐던 마오쩌둥도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였다. 공산당의 초기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리따자오도 북경대학 도서관장 겸 역사학과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26세의 마오쩌둥은 이 대학의 마르크스연구회 등에 적극 관심을 기울였다. 조직의 귀재, 리따자오는 국공합작이 이뤄지자, 국민당에 가입하였으며 군벌반대 투쟁에 나섰다. 1927년, 애석하게도 군벌 장작림(張作霖)의 특무에 체포돼 39세로 요절하였다.

저명한 경제학자 겸 인구학자 마인추(馬寅初)도 북경대학 강단에 섰다. 그는 후에 북경대학 총장과 절강대학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인구학 발전에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인구학 분야 제1인자로 추앙을 받았다.

리쓰광(李思光, 원명 리중쿠이李仲揆)은 영국 버밍험 대학에서 지질 분야를 전공하였다. 그 역시 북경대학 지질학 교수로 발탁되었다. 그는 중국 근대 지질학의 개척자라 불렸다. 당시 200여 명의 교직원 평균 연령은 30세에 불과하였다. 예를 들면 쉬베이훙은 24세, 후스는 28세, 리따자오는 30세였다.

인재를 모으기 위해 절치부심하였던 차이위안페이의 노력 중 인상적인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만 24세의 청년학자 량수밍(梁?溟, 1893~1988)은 불교 및 인도철학에 조예가 있었다. 차이위안페이는 우연히, 1916년《동방잡지》에 실린 그의 논문, <구원결의론(究元?疑論)》을 읽고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논문은 불교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인생의 고통과 해결을 모색하는데 초점이 모아졌다. 차이위안페이는 그를 강단에 세우고자 하였다.< p>

나이가 어리고 강의 능력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강단에 서기를 고사하는 량수밍을, 차이위안페이가 직접 설득에 나섰다. 그 무렵 북경 대학 학생 중에는 량수밍 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차이위안페이는 그에게 연구에만 전념하도록 배려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파격적인 대우를 받는 연구교수였던 셈이다.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전통은 한낱 소설에나 등장하는 얘기가 아니었다(강성현 저,《중국인은 누구인가》,197).

량수밍은 1921년에 <동서 문화와 그 철학(東西文化及其哲)>을 발표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유교를 포함한 중국의 전통문화가 서구문화보다 우월하다는 논지를 편 것으로, 당시의 신사조에 역행하는 논문이었다. 량수밍은 북경대학에서 7년을 몸담았으며, 이 기간에 학자로서의 자질과 기초를 다졌다. 량수밍은 향촌 교육운동에 헌신하였고, 96세로 서거하기까지 ‘신 유학자’, ‘문화보수주의자’로서의 명성을 드날렸다.

1928년 중앙연구원장에 취임했을 때도, ‘과학입국’을 제창하며 해외 유학파들을 끌어 모았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공부한 과학 두뇌들이 가난한 고국으로 속속 몰려들었다. 하버드대 기상학 박사, 주커전(竺可楨)은 중국 근대 기상분야에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과학적 기법으로 중국의 강수량과 태풍문제를 최초로 연구한 학자였다.

하버드대 인류학 박사 출신, 리지(李濟)는 중국의 고고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차이위안페이는 34세의 리지를 중앙연구원 역사ㆍ언어연구소 주임으로 발탁하였다. 후에 리지의 주도로 은허를 발굴ㆍ고증하여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리하여 “선생이 북상하면 인재가 북으로 좇아오고, 선생이 남하하면 인재가 남으로 몰려온다(위의 평전, 350).”는 얘기가 파다하게 퍼졌다.

이처럼 차이위안페이는 농부의 심정으로, 인재를 심고 길러 꽃피웠다. 광맥을 찾는 광부처럼, 인재를 발굴하고 발탁하였다. 그가 펼친 무대에서 혁명인재, 교육 인재, 과학 영재, 문예계의 천재들이 마음껏 꿈을 펼쳤다.

마오쩌둥은 장인과 자신을 품어준 차이위안페이를 ‘학계태두, 만세 귀감’ 여덟 글자로 기렸다. 유비, 당태종, 차이위안페이 그리고 덩샤오핑으로 이어지며, ‘인재’를 받드는 사회 풍토와 지도자의 혜안이 오늘의 인재강국, 경제대국을 탄생시켰다.

현자가 숨고 협량(狹量)이 활개 치는 사회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하다. 맹종을 충성으로 여기는 윗사람의 주위에는 ‘충견(忠犬)’들만 모인다. 간악한 자, 교활한 자, 탐욕스런 자, 편파적인 자를 중용하면 사회는 급속히 부패한다. 이러한 사회는 재선충(材線蟲)이 갉아 먹어 황량한 소나무 숲 같다.

인재가 매장되고 사장되는 ‘병든 숲’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으로서, 인재를 동서남북으로 몰고 다닌 차이위안페이 선생이 ‘암 기린의 뿔(麟角)’처럼 희귀한 존재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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