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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감옥동지' 포우 김홍량 독립유공자 서훈 끝내 취소

중앙일보

입력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백범 김구 선생의 ‘감옥동지’였던 포우(抱宇) 김홍량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됐다.

서울고법 행정5부(부장 성백현)은 김 선생의 넷째 아들인 김대영 전 건설부 차관이 “고인을 친일행적자로 단정해 서훈을 취소한 것은 부당하다”며 국가보훈처장 등을 상대로 낸 소송의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고 30일 밝혔다.

황해도 안악지방에서 태어난 김 선생은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 위한 농촌계몽 및 독립운동가 후원사업을 활발히 전개했던 인물이다. 1906년 안악읍에 양산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있으면서 황해도 일대의 교육구국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1907년엔 양기탁, 안창호 등이 포함된 비밀결사체 신민회에 가입해 황해도지회에서 가장 유력한 회원으로 활동했다. 1911년에는 황해도 지역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하다 발각된 이른바 ‘안악사건’으로 체포돼 김구 선생 등과 함께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15년 10월 가석방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이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1977년 정부는 김홍량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했다.

하지만 2010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김 선생의 친일행적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실리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김 선생은 1915년 당시 출옥 후 이전과 정반대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1928년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은 것을 필두로 1929년 조선박람회 평의원으로 임명됐고, 1938년엔 일본군의 중국 남경 점령을 축하하는 발언을 하면서 일본 신사에 참배했다. 1939년 일본군이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해 전시체제 협력방안을 논의했으며 1941년 친일전쟁협력기구인 서울임전보국단 평의원에 선출됐다는 내용이었다.

황해도 안악 지방의 재력가였던 그가 육군지원병훈련소 환자 수송용 자동차 구입비로 2000원, 황해도 신천경찰서 건축비로 1000원 등 일제 측에 헌납한 전력도 드러났다.

정부는 결국 2011년 김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취소했다. 이에 김 선생의 유족들은 “김 선생의 행위가 일제에 의해 이름이 도용되거나 강요에 의한 것”이라며 서훈을 취소한 국가보훈처장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비록 김 선생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다 하더라도 친일인명사전에 적힌 행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며 “당시의 조선총독부 관보,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에 객관적인 사실로 보도되거나 수록됐다”고 제시했다. 이어 “이런 사실은 서훈 공적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서훈을 취소한 것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앞서 1심과 2심은 서훈취소권은 대통령에게 있는데도 국가보훈처장 명의로 서훈 취소가 통보돼 무효라며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들어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대법원은 대통령의 최종 결재가 대외적으로 표시돼 서훈 취소의 효력이 발생했다고 판단해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고 김 선생의 서훈은 끝내 취소됐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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