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이 막막한가? 3000년 인간살이 빅 데이터 『사기』를 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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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BC 145~BC 86 추정)의 『사기(史記)』. 역사가들은 이걸 ‘절대 역사서’라 부른다. 한(漢)나라의 국립도서관장이었던 사마천은 3000년에 걸친 중국의 역사, 그 속에서 피고 졌던 숱한 인물의 생애를 역사로 남겼다. 그게 한자(漢字)로 52만6500자다. 무려 13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40대 초반에 집필을 시작해 55세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천의 『사기』에 인생을 송두리째 건 이가 있다. 대학 교수직마저 때려치우고 20년간 130여 차례 중국을 오가며 사마천의 『사기』를 파고 있는 김영수(56) 한국사마천학회 상임이사 겸 연구원이다. 11일과 18일, 두 번에 걸쳐 그를 인터뷰했다. 김 연구원은 “서양에는 아무리 훑어봐도 『사기』에 필적할 만한 역사서는 없다. 『사기』에는 3000년 시공간을 초월한 역사와 인간의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마디로 ‘빅 데이터’다”고 말했다. 누구든지 이 ‘고농도 압축파일’을 풀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 건가’가 보인다고 했다.

 

김영수 연구원은 “사마천은 보통사람을 주목했다. 그들이야말로 역사의 주인이라고 보았다. 봉건시대에 그렇게 쓸 수는 없었다. 대신 『사기』의 절반 이상을 보통사람을 다룬 ‘열전’에 할애했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사기』 속에 왜 길이 있나.

 “읽어 보라. 그럼 세 종류의 인간 유형을 만나게 된다. 하나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다. 내 삶의 멘토로 삼을 수 있는 유형이다. 또 하나는 내가 아주 증오하는 유형이다. 닮아선 곤란하다. 마지막 하나는 뭐겠나. 나와 똑같은 유형이다. 그래서 『사기』를 ‘인간학 교과서’라고 부른다.”

 사람은 누구나 점(點)으로 살아간다. 기껏해야 100년인 삶의 선분에서 늘 점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미래가 궁금하다. 내 앞날에 어떤 점이 찍힐지. 그는 그럴 때 『사기』를 보라고 했다.

 “『사기』는 삶의 선택, 그에 따른 구체적 결과까지 통째로 보여준다. 어떠한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았고 어떤 결과가 나왔나. 그게 입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래서 내 삶의 앞과 뒤를 미리 보게 한다.”

 사마천은 49세 때 성기가 거세되는 궁형을 당했다. 이릉이란 죄 없는 젊은 장수를 변호하다가 반역죄로 황제의 미움을 샀다. 감옥에 갇힌 3년간 『사기』를 쓰지 못했다. 궁형은 당시 대수술이었다. 얼마나 더 살지도 모를 일이었다. 치욕스러운 형을 당한 후에야 황제의 오해가 풀렸다. 환관이 된 사마천은 황궁에서 퇴근한 후 밤마다 『사기』를 써내려 갔다.

 전설 속 중국의 시조인 황제부터 요·순 임금, 하-은-주 왕조,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의 천하통일, 7년에 걸친 초한(楚漢)쟁패, 유방이 세운 한나라까지 기록했다. 사마천은 한나라의 5대 황제인 무제 때 사람이다.

 -『사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의 책이고 연민의 책이다.”

 -왜 그런가.

 “사마천이 역사를 ‘연민의 눈’으로 봤기 때문이다. 『사기』에는 인간에 대한 깊고도 따뜻한 눈이 깔려 있다.”

 -역사가에게 필요한 건 온기가 아니라 냉기 아닌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냉철과 객관이 있어도 ‘연민의 눈’이 없다면 사가(史家)로서 허무하다. 사마천에게는 수많은 보통사람에 대한 따뜻한 가슴이 있었다. 그게 사마천의 위대함이다.” 실제 『사기』 130권 중 절반이 넘는 70권이 보통사람들을 다룬 ‘열전’이다.

 -사마천이 푼 연민의 눈, 가령 어떤 식인가.

 “한나라에 한신이란 장수가 있었다. 개국공신인 그는 나중에 반역죄로 삼족이 멸함을 당했다. 당시 사마천은 공식 기록을 살폈다. 이해가 안 갔다. 아무리 봐도 한신이 모반을 일으킬 만한 여건이 못됐다. 그래서 한신의 고향인 장쑤(江蘇)성으로 직접 갔다. 한나라 개국 후 100년이 채 안됐을 때다. 고향 마을에는 한신에 대한 여러 일화가 내려오고 있었다. 거기서 사마천은 손수 취재를 했다.”

 - 무엇을 위한 취재였나.

 “사실(Fact)과 진실(Truth). 그 사이에서 사마천은 끝없이 고뇌하고 끝없이 물었다. 진실에 더 다가서기 위해서였다. 그건 한신이란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취재를 해보니 ‘한신은 억울하다’는 게 사마천의 판단이었다.”

 - 그래서 어떡했나.

 “역사서에 ‘억울하다’고 쓸 수는 없었다. 그럼 권력자가 책을 다 폐기해버릴 테니까. 사마천은 문학적으로 기술했다. 한신이 젊을 적에 다리를 건너다가 건달들과 시비가 붙은 일화가 있다. 큰 뜻을 품은 한신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건달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갔다. 『사기』에는 한신이 기기 전에 ‘건달의 얼굴을 한참 동안 빤히 쳐다봤다’고 또렷하게 기술돼 있다.”

 - 그게 무슨 뜻인가.

 “한신이 건달에게 보내는 모욕이자 경멸이다. 한신이 비굴한 인간이 아님을 사마천은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마지막 논평에서 사마천은 ‘한신이 조금만 고분고분했더라면 천하의 명재상 반열에 올랐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건 전쟁 중 주인을 떨게 할 만큼 큰 공을 세운 자의 전쟁 후 처신에 대한 지적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역사를 꾸려간다. 자기 삶에서는 모두가 ‘사가(史家)’다. 김 연구원은 “역사가는 ‘천 개의 눈’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역사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 왜 ‘천 개의 눈’이 필요한가.

 “다들 두 개의 눈으로 산다. 그게 나의 입장이다. 그것으로만 역사를 보면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럼 진실에서 멀어진다. 사마천이 한신의 고향에 갔을 때 그는 비로소 ‘한신의 눈’을 얻었다. 우리는 역사의 구체적 정황 속에서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

 - 그럼 어떡할 때 ‘천 개의 눈’을 얻게 되나.

 “나의 눈, 나의 관점, 나의 입장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또 하나의 눈’을 얻게 된다. 상대의 입장에서 나를 보고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볼 때 ‘또 하나의 눈’이 생긴다. 그런 눈들이 모여 ‘천 개의 눈’이 된다. 역사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천 개의 눈’이 바로 ‘중도(中道)의 눈’이다.”

 - 그래도 『사기』는 중국의 역사가 아닌가.

 “중국 역사이기 전에 동양의 역사다. 당시에는 우리가 공유하는 세계사였다. 또 동양의 역사이기 전에 3000년에 걸친 인간의 역사다.”

 중국에는 세 개의 국가급 제사가 있다. 하나는 전설 속 중국의 시조인 ‘황제(黃帝)’, 또 하나는 공자에 대한 제사다. 5년 전에 민간 제사 하나가 국가급 제사로 격상됐다. 다름 아닌 사마천이다. 김 연구원은 “사마천의 고향인 산시성 한청(韓城)은 시진핑 주석의 고향 산시성 푸핑(富平)에서 차로 불과 1시간30분 거리”라고 설명했다.

 -문학적 표현도 마다 않는 사마천의 역사 서술 방식은 금기 아닌가.

 “사마천은 상상력을 중시했다. 어떤 사람은 ‘역사가에게 상상력은 금물이다. 오직 팩트(사실)만이 전부’라고 말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역사가는 끝없이 물음을 던져야 한다. 만약 이랬다면 어땠을까, 만약 저랬으면 어땠을까, 왜 그렇게 했을까. 이런 물음을 통해 오히려 우리는 팩트 너머의 진실에 다가서게 된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나. 물음을 던지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건조하고 허무한가. 우리의 삶도 우리의 역사도 그런 상상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럴 때 삶의 골수, 역사의 골수를 관통한다.”

[S BOX] 다다익선·토사구팽 … 고사성어 출처 25%는 『사기』

김영수 연구원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즐겨 사용하는 고사성어(故事成語)의 약 25%는 출처가 『사기』다. 핵심은 ‘성어(成語)’가 아니라 ‘고사(故事)’다. 사마천은 고사를 통해 독자에게 가치와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고 말했다. 가령 한신은 한나라 유방에게 “황제께선 10만 명을 거느릴 장수”라고 했다. 유방이 “그럼 너는?”하고 되묻자 한신 자신은 “많을수록 좋다”고 답했다. 거기서 ‘다다익선(多多益善)’이 나왔다. 개국공신 한신은 나중에 숙청당했다. 거기서 또 ‘토사구팽(兎死狗烹·토끼를 잡은 후에 사냥개를 삶아 먹다)’이란 고사성어가 『사기』에 등장한다. 중국인에게 ‘다다익선’이란 말 뒤에는 ‘토사구팽’의 그림자가 늘 어른거린다. 다음은 김씨가 추천하는 역사서 세 권이다.

 ◆사기 교양강의(한자오치 지음, 돌베개)=『사기』를 왜,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막연한 물음이다. 이에 답을 주는 책이다. 사마천 대가의 안내는 친절하고 쉽지만 결코 얕지 않다.

 ◆조선상고사(신채호 지음, 역사의아침)=악플보다 더 지독한 것이 무플이라고 한다. 다 알고 있지만 권하지 않고, 인정하면서도 배우고 따르려 하지 않는 ‘저주 받은 통사(痛史)’다. 성균관 유생에서 아나키스트까지, 단재의 슬픈 삶 자체가 우리의 역사다.

 ◆요동사(김한규 지음, 문학과지성사)=한·중·일, 그리고 러시아의 자료들을 살피고 해석한 후 저자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요동’이라는 공동체가 있었음을 제시한다. 역사 연구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물음을 가진 분들에게 권한다.

김영수는

1959년 경남 진해 출생.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대 한·중 관계사를 공부하다 『사기』에 매료됐다. 영산 원불교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한글 세대를 위한 『사기』 완역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36계』 『사기를 읽다』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 등.

글=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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