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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없는 삶' 속에서 '삼시세끼'는 사치일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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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훈 기자 중앙일보 기자
정종훈 사회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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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후 9시40분 ‘냉장고를 부탁해’(JTBC), 수요일 오후 11시 ‘수요미식회’(TVN), 금요일 오후 9시45분 ‘삼시세끼’(TVN), 일요일 오전 8시20분 ‘잘 먹고 잘 사는 법, 식사하셨어요?’(SBS)…. 요즘 나의 리모컨을 붙들고 있는 ‘먹방’, 즉 먹는 프로그램이다.

 본방송을 사수하지 못하면 재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 나중에라도 꼭 보고야 만다. 나만 챙겨 보는 줄 알았더니 먹방이 요즘 대세 중의 대세다. ‘삼시세끼’는 시청률 10%를 넘겨 ‘국민 프로그램’이란 이야기까지 듣는다. ‘냉장고를 부탁해’는 첫 회 1%대였던 시청률이 벌써 4%를 눈앞에 두고 있다. 워낙 먹방이 화제이다 보니 다른 예능 프로그램들에도 초대 손님이 평소 즐겨 먹는 음식을 요리해 선보이는 코너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 육아 프로그램에서도 매주 꼬마들의 먹는 모습이 빠지지 않는다.

 인기 있는 먹방은 대부분 직접 요리해 보고 먹어 보는 체험형 프로그램이다. 동네방네 맛집을 단순히 찾아가 소개하기만 하던 예전 진행 방식에서 몇 단계 진화했다. 주변 친구들도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거나 “해보고 싶은 레시피가 자주 나와 꼭 챙겨 본다”는 반응이다.

 사실 ‘먹방 열풍’은 바쁜 일상에 치여 아침 식사를 거르고, 점심·저녁도 대충 때우는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서글픈 트렌드일지 모른다. 새벽별 보고 출근해 새벽별 보고 퇴근하는 직장인들에게 솔직히 삼시세끼 제대로 챙겨 먹는 건 최고의 사치나 다름없다. 거의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한 친구는 “하루 종일 먹는 걸 고민하는 먹방 출연자들을 보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같다”고 했다.

 TV에선 우리가 ‘안 해먹는’ 게 아니라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못 해먹는’ 음식들을 만드는 과정까지 세세히 보여주며 시청자들의 눈이라도 호강시켜 주고 있다. ‘저녁이 없는 삶’을 사는 한국인들이 ‘그림의 떡’만 지켜보며 위로받고 군침을 흘리는 셈이다. 맞벌이 부부인 나도 평소 식사는커녕 아내 얼굴조차 제대로 마주하기 힘든 날이 대부분이다. 어쩌다 일찍 집에 들어가도 몸은 한없이 피곤하고, 손은 자연스레 배달 점포 전화번호를 찾고 있다. 건강한 밥상을 꿈꾸지만 고열량에 나트륨 범벅인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급격히 늘어나는 허리 둘레를 고민하는 것이 현실이다.

 늦은 밤 집에서 이 글을 쓰는 내 옆엔 ‘배달표’ 프라이드 치킨과 ‘편의점표’ 삼각김밥이 놓여 있다. 학창 시절 매일 차려 주셨지만 그 소중함을 모른 채 무심코 목구멍을 넘겼던 소박한 ‘엄마표’ 밥상이 이제는 그립다. 낄낄대면서 즐거워했던 어제 본 먹방이 갑자기 슬프게 느껴진다.

정종훈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