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27. 도쿄올림픽 폐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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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도쿄올림픽을 통해 필자는 우리 스포츠의 현주소를 읽을 수 있었다. 스포츠 선진국 선수들의 경기를 관전하는필자(앞줄 왼쪽에서 둘째)의 표정이 어둡다.

사요나라(안녕) 도쿄. 흐느끼는 듯한 '올드 랭 사인' 멜로디가 밤하늘을 적셨다. 어둠에 뒤덮인 도쿄 올림픽스타디움. 그라운드는 작별의 아쉬움과 귀향의 설렘에 사로잡힌 올림피안의 환호가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쓸쓸하고 서글펐다. 최선을 다했지만,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또 다시 언젠지 모를 미래로 내던져졌다. 전광판에 아로 새겨진 '멕시코에서 다시 만나자'는 글귀를 바라보며 내 마음은 착잡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4년 뒤를 생각하며 걱정이 앞섰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튿날인 1964년 10월 27일. 삼일당에서 선수단 해단식이 열렸다. 나는 선수들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종점은 없습니다. 다만 전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는 부채요, 패배는 재산입니다. 오늘의 이 쓰라린 마음을 고이 간직해 멕시코대회에서 다시 겨루어 이긴다는 새로운 출발의 결의를 가다듬읍시다. 그러기 위해 '싸움은 이제부터'라는 와신상담의 각오로 다시 뛰고 다시 달리는 데 우리 모두가 굳게 결속하고 단결합시다."

도쿄올림픽은 내가 대한체육회장에 취임한 지 8개월 만에 뛰어든 세계 스포츠의 용광로였다. 나는 우리 스포츠의 좌표가 어디인지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을 통하여, 나는 한국 스포츠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았다. 우리에겐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결핍을 해소할 아무런 방법도 손에 쥐고 있지 못했다.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보고, 그 해결의 가닥을 찾아나가야 했다.

나는 우리 스포츠의 문제점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지도자들의 지식이 부족하고 지도 방식이 비합리적이다. 둘째, 국제 정보가 전무하다. 셋째, 선수들이 게으르고 정신자세가 해이하다. 넷째, 체육과학과 시설이 낙후됐다.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 금메달은커녕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국제 스포츠의 흐름조차 따라잡기 어렵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나는 개혁의 몸부림으로 스스로를 불태우지 않고서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한국 스포츠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65년 1월 23일. 나는 대한체육회 정기총회에서 2년 임기의 회장으로 다시 추대됐다. 만장일치였다. 그것은 지난 1년의 경험을 토대로 새롭게 정진하라는 준엄한 요구였다. 나는 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스포츠 중흥을 위한 6개년 장기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지도자 자질 향상▶스포츠 인프라 구축▶효율적인 훈련▶스포츠 과학화▶유망주 발굴 등이었다. 이 모든 일은 엄청난 돈을 필요로 했다.

자체 수입이 거의 없는 체육회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업을 진행할 것인가. 당시 체육회 예산은 정기총회를 통과한 예산안이 문교부를 거쳐 경제기획원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점점 줄어들어 흔적만 남곤 했다. 체육회는 그 해 정부에 1억8000만원의 보조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액은 경제기획원에서 80만원으로 삭감돼 버렸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나는 집권당의 당무위원이라는 신분을 십분활용했다. 경제기획원 장관과 차관에게 강하게 입장을 설명하고, 예산담당 국장이나 실무과장은 잘 알아듣도록 다독여 분위기를 돌려놓았다. 80만원으로 삭감됐던 체육회 예산은 6500만원으로 늘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렇게 해 놓으면 나머지 부족분을 정부 예비비나 특별회계에서 보충받는 형식으로 메울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음으로 양으로 많이 지원해 줬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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