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권력의 진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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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현대사다. 그와의 만남은 과거사 탐방이다. 그의 기억 창고는 정돈돼 있다. 그의 회고는 선명하다. 50여 년 전 사건이 어제 일이다. 때로는 역사 풍경화를 그리는 듯하다. 그는 “그림은 묘하다. 인생 여정과 같다”고 했다.

 JP의 역정은 파란과 곡절이다. 그런 삶은 상식을 깬다. 그는 정치 9단으로 불렸다. 나는 물었다. “정치 9단의 요체는 뭡니까.” 답변에 경륜·역사관·용기가 나열될 걸로 생각했다. 그는 달랐다. “그거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거지.”- (중앙일보 3월 2일자) 그의 받아넘김은 능숙하고 쾌활했다. 권모술수는 꺼림칙하다. 3김 정치의 노회하고 어두운 부분이다. 그의 응수는 그런 한마디다. 그는 상투적인 전개를 거부한다. 반전(反轉)은 절묘함을 낳는다. 나는 허를 찔린다.

 그는 정치의 조형미를 추구했다. 이제 그는 장치를 떼어낸다. 거기에 달린 격식을 밀어낸다. 그 생략은 정치의 위선과 속설의 정비다. 그것은 JP 증언의 신뢰도를 높인다. 회상은 고백이 된다.

 5·16의 상징은 반공 국시(國是)다. 그 당시 혁신계와 일부 대학가 시위는 용공 쪽으로 달려갔다. 그 때문에 반공을 앞세운 것으로 기록됐다. JP도 이전엔 그렇게 설명했다. 이제 달라졌다. 그는 “혁명 취지문의 첫 반공 조항은 박정희 소장의 좌익 의혹을 씻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거사 주역이다. 궐기 선언문을 썼다. 그 술회는 역사의 전면 수정이다.

 박정희(소령 시절)는 숙군(肅軍)의 희생자였다. 군부 내 남로당 소탕 바람에 박정희는 휩쓸려 갔다. 그 척결은 6·25전쟁 때 후방의 반란을 차단했다. JP는 그 긍정적 효과를 언급한다. 숙군의 과열과 부정적 요소도 지적한다. 그의 증언은 현대사 해원(解<51A4>)의 자산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의 회고는 긴장감을 준다. 박정희 권력의 진실을 말할 때 강렬해진다. 그만큼 그 진실에 다가선 사람은 없다. 박정희 정권의 인상은 철권이다. 유신독재의 긴급조치는 그런 이미지를 굳혔다. JP 증언은 그 평판을 재구성한다. “박 대통령의 권력 의지가 형성된 건 1960년대 후반이야. 혁명 초기엔 허약했고 몇 차례나 그만둔다고 했어.”

 박정희-김종필 조합은 흥미롭다. 그 관심의 마지막은 ‘박정희 하야와 JP 후계’ 시나리오다. 질문을 던졌다. “박 대통령이 후계자 약속을 한 적이 있습니까.” JP는 고개를 젓는다. “박 대통령한테서 ‘후계자가 너’라는 얘기를 직접 들은 적은 없어. 박 대통령이 마지막에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믿지 않아.”

 1, 2인자의 18년 동행은 이례적이다. 권좌의 속성은 결별과 숙청이다. 이집트의 나기브-나세르 혁명도 그랬다. 박정희-김종필은 처삼촌과 조카사위 관계다. 권력의 냉혹함은 그런 요소를 묵살한다. JP의 좌절은 여러 번이다. 박정희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2인자의 항명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박정희는 2인자를 제거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JP의 공간을 인정했다. 그 권력과 인간관계는 연구 소재다.

 JP의 준비된 답변이 있다. 5·16의 반민주·쿠데타 논쟁에 대해서다. 그는 거침없다. “쿠데타건 혁명이건 상관 안 해. 5·16은 우리 사회 전 분야에 본질적인 변화를 이끌었어. 그게 혁명이야.” 5·16 실적은 산업화로 존재한다. 그의 국가 발전론은 선(先)경제-후(後)정치다. 산업화를 이루면 민주화 기반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맹자의 ‘무항산(無恒産)·무항심(無恒心)’으로 설명한다.

 20세기 많은 신생국들 전략은 비슷했다. 민주화 우선, 또는 경제와 정치의 동시 발전이었다. 그 의욕은 파탄 났고 실패했다. 한국은 선후 순위를 두었다.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했다. 그 과정에 민주화 투쟁의 희생은 컸고 아픔은 깊다.

 JP의 그 대답은 복합적이다. 적당히 퉁명스럽다. 자부심을 알맞게 둘러댄다. 때론 후세대에 대한 JP식 웅변으로 퍼진다. 그것은 “쿠데타 명분 논쟁에서 벗어나 나라 융성을 위한 실질 목표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는 오랫동안 증언에 주저했다. “속으로 잡아매는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회고록을 쓸 의향이 다분히 있었어. 수첩에 적는 습관, 정밀한 성격이셨고 자료를 모으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셨어.”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 일기를 썼다. 그는 덧붙인다. “박 대통령이 이렇게 물으셨지. 임자(JP)는 회고록을 많이 읽었는데 누구 것이 제일 마음에 들어.” 그래서 “제가 감명받은 것은 처칠과 드골 회고록이라고 했지.”

 그는 ‘뒷받침’을 말한다. 박정희를 떠올리면서 쓰는 단어다. 그때 잠기는 감회는 오래된 풍운의 발산이다. 뒷받침의 끝은 박정희 권력 진실의 정리일 것이다. 그 시대의 재발견이다. 그것은 JP 증언의 매력을 더한다.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