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권력의 외교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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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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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지도력을 단련시킨다. 외교는 리더십 상상력의 무대다. 올해가 한·일 국교 정상화 50년이다. 그 정상화는 박정희 정권의 작품이다. 그 시절 북방 대륙은 막혔다. 옛 소련과 중국은 적대국이었다. 한국의 진출로는 남방 대양 뿐이었다.

 대양은 리더십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 시대의 설계자 김종필(JP)은 새롭게 접근했다. “한국은 대륙에 붙은 맹장 같은 신세다. 우리는 태평양·대서양으로 가야 한다. 일본을 우회해선 가기 힘들다.” 그것은 외교적 감수성의 혁신이었다.

 상상력은 리더십에 용기를 넣는다. 박정희는 국교정상화를 결심했다. 그는 “어제의 원수라도 오늘과 내일을 위해 필요하면 그들과 손을 잡아야 하는 것이 국리민복을 도모하는 현명한 대처”라고 했다. 그런 자세는 일본 활용이다. 친일이 아니다. 그것은 수출 경제와 개방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한·일 관계는 위험하다. 갈등과 미움은 넓고 깊다. 그 양상은 박근혜 대통령-아베 총리의 정권 차원을 넘었다. 대다수 한국인은 일본을 싫어한다. 혐한(嫌韓)은 과거 일본 극우파의 감정이었다. 이제 일본인의 보편적 의식으로 퍼지고 있다. 박정희 시대의 외교 산물은 악화됐다. 딸의 시대에 늪에 빠졌다. 그것은 기묘한 역설이다.

 파행 책임은 아베의 역사퇴행이다. 그는 위안부 문제를 교묘하게 회피한다. 그것은 개탄과 분노를 낳는다. 아베의 태도는 한국과 중국을 뭉치게 했다. 중국은 그 기회를 다른 측면에서 활용했다. 중국 외교의 목표는 한·미·일 협조체제의 균열이다. 그 삼각 고리의 취약점은 한·일 부분이다. 중국은 거기에 주목했다. 시진핑 주석은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지었다. 고마운 일이다. 기념관은 공조의 상징이다.

 역사는 외교의 무기다. 둘의 관계는 민감하다. 과거사 공동 대처의 장면은 강렬하다. 그것은 외교의 이미지를 선점한다. 그 때문에 독자 타개의 면모가 일정 수준 필요하다. 공조는 학계와 시민단체가 주도해야 한다. 하지만 양국 정부의 대일 공세는 거셌다. 그 합작은 내달리는 모양새로 비춰졌다. 한국 외교의 인상은 급속히 바뀌었다. 국제 사회에 친중· 반일로 굳어졌다. 한국이 중국으로 기운다는 평판은 확산됐다. 한·미 동맹에도 불편한 기류가 흐른다. 시진핑의 역사 외교는 주효했다. 그것은 한국 외교의 상상력 부족을 드러낸다.

 한국은 중국의 신세를 졌다. 아베 압박에 서로가 힘을 빌렸다. 중국의 대국 기세는 거침없다. 정부의 중국 눈치보기는 심해졌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문제가 그랬다. 미국 미사일 사드(THAAD) 배치의 고민은 커졌다. 한·중 간에도 고대사 분쟁이 있다. 그 대립은 잠복 상태다. 동북공정 논란은 재등장할 것이다. 그때 우리 외교는 낭패에 빠질 것이다.

 미국에도 아베 비판 여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국제 정치는 미묘하다. 그 세계의 작동요소는 국익이다. 도덕주의는 밀려난다. 한·중 역사 밀월은 특별나다. 그 모습은 워싱턴의 경계심을 키웠다. 미국의 우선 관심은 중국의 영향력 차단이다. 그것은 미·일 동맹을 두텁게 했다. 미국 의회의 아베 연설 초청은 부산물이다.

 일본 내 한류는 침체했다. 양국 관계의 악화 탓이다. 한류는 김대중(DJ) 시대의 작품이다. 1998년 DJ는 이렇게 일본에 다가갔다. “한·일 교류사에서 사이가 나빴던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 7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 후 40년 등 50여 년이다. 그 때문에 1500년 좋은 관계가 손상되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 발언은 대담하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파격적이다.

DJ는 조선통신사에서 영감을 얻었다. 역사의 상상력은 결단을 내리게 한다. 대중문화의 교류가 시작됐다. 그때 반대자들은 “왜색(倭色)문화가 번진다”고 했다. 그 논리는 65년 ‘매국 외교’ 반대의 연장이었다. 한류는 장기간 번창했다.

 동북아 정세는 거칠다. 일본의 우익 쪽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그 흐름은 아베의 위안부 사과 여부와 상관없다. 일본은 군사대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베는 야마구치(山口) 출신이다. 그곳 역사는 아베의 상상력을 키웠을 것이다. 야마구치는 메이지 유신의 태동지다. 제국 일본 팽창의 정신적 기지였다. 한국은 지정학적 숙명을 갖고 있다. 주변 강대국들과 친해야 한다. 북한의 핵 야욕은 건재하다. 일본의 정보 지원은 중요하다.

외교의 완승·완패는 없다. 직설과 단선은 필수적이다. 은유와 복선의 협상도 동원해야 한다. 그것은 원칙과 실용의 배합이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외교 성취 바탕은 상상력이다. 일본을 써먹는 용일(用日)은 그것으로 다듬어졌다. 극일의 다짐도 마찬가지였다. 상상력을 연마해야 한다. 그것으로 외교의 관점과 안목은 풍부해진다. 외교의 상상력은 권력의 성패를 가른다.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