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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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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소크라테스」가 반성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을때 그가 말하는 「반성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매사를 항상 신중하게 판단하며 슬기롭게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우리는 물론 인간이 항상 동물적 욕구의 충동에 의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삶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심각하게 질문을 던질 경우는 대부분 사태가 거의 호전될 수없이 악화되었을 때뿐인 것도 사실이다. 소를 잃은 다음에야 외양간을 고쳐보려고 허둥대는 것이 우리들 대부분이 이끌어 가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러한 종류의 삶이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철학에의 첫걸음>
「소크라테스」는 반성된 삶을 살아가는 한가지 방법으로 『내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자기자신에게 계속 던질 것을 권한다.
그것은 물론 「소크라테스」만의 가르침은 아니다. 공자도 『나를 어찌할까, 어찌할까 하고 묻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알아야한다. 그것이 설사 진리를 발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자기생활의 질서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게된다. 이것보다 더 훌륭한 일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동서고금의 현철들은 자기자신이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물어봄으로써 반성된 삶, 즉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철학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는 발판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집요하게 계속 던지면 결국 그것은 우리를 철학의 과제인 근원적인 문제들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다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와 당위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문을 깊이 파고들면 드디어 나는 내 주위에 눈을 돌리게 되고 거기에 수없이 많은 다른 사람들과 산천초목과 별들과 그밖에 모든 것들이 있음을 보게된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수 없다. 나는 그 숱한 세월중에서, 그리고 그 드넓은 우주안에서 하필 왜 지금 여기에 이런 모습을 지니고 살게 되었는지의 문제에 부딪치게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무엇이며 우주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것은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내 자신을 포함한 인간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인간은 천문학자들이 생각하듯이 지구라는 조그만 행성위를 기어다니는 미물에 지나지 않은가, 혹은 화학자들이 생각하듯이 교묘하게 혼합된 화학물질의 덩어리에 불과한가, 혹은 종교인들이 보듯이 조물주의 회심에 찬 걸작품인가, 아니면 실존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책임과 자유의 주체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생각하는 삶을 위하여 우리가 제기하는 철학적 과제의 일부다. 이 과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한 철학적 관점에서 볼때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이 곧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무지의 지)』고 말한 「소크라테스」적 앎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문제들은 병원이나 실험실에서 해결할 것도 아니고 컴퓨터로 풀수 있는 것도 아니다.

<쓸모없는 학문인가>
우리는 흔히 예언자들이나 종교인들 혹은 과학자들이 그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그들의 답변에 만족할수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있다. 또한 상식은 이러한 문제들을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그것은 생래적인 환부처럼 우리의 내부 깊숙한 곳에 항상 도사리고 있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철학적 문제들이란 사물의 현상에 대해서 경이(taumazein)와 의혹과 애착을 가지고 깊고 넓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합리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이며, 따라서 그것은 비합리적인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가 없는 문제다.
상식이 이 문제들을 외면하고 종교가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하며 과학이 아무리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하더라도 아직 철학이 존재해 있는 이유가 이런데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상식적 위안이나 종교적 해탈 혹은 과학적 설명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은 과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 왔는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고금동서를 통해서 많은 철학자들이 수많은 철학적 문제들을 놓고 고심해 왔지만 속시원한 답변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철학사의 진행에 따라 오히려 그들은 더욱 복잡하고 많은 질문을 제기해 왔을뿐 해결의 실마리조차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각양각색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답변들을 마련하기도 하였지만 후대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논박되거나 경험과학자들에 의해서 반증되거나 상식인들에 의해 백안시되기가 일쑤였다. 문제의 해결에 관한한 철학은 여전히 허약하고 진부하며 때로는 유치하기까지 한 학문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철학은 종교처럼 구원을 약속하거나 해탈을 보장하지 못하며 과학처럼 현상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설명하지도 못한다. 더구나 그것은 상식처럼 생활의 방편을 제시하지도 못하며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칼리클레스」와 같은 풋나기로부터 철학을 그만두고 좀 더 쓸모있는 일에 종사하라고 충고를 받은 이유다.

<참된 것에 의미부여>
그렇다면 철학은 과연 쓸모없는 학문인가? 학문이란 것이 옳든 그르든 끊임없이 해답만을 제시해야하는 작업이라면 분명히 그렇다. 철학은 스스로 제기한 여러 가지 근원적인 질문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답변을 마련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오한 질문의 제기도 학문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라면 철학의 유용성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철학은 진부하고 평범한듯한 질문들을 짓궂게 끊임없이 던짐으로써 우리에게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현상의 참되고 거짓됨과 행위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수 있는 능력, 즉 지혜를 길러주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것은 거짓된 것과 그릇된 것에서 벗어나 옳은 것과 참된 것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좌표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는 것이다.
철학의 유용성을 우리는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볼수 있는데, 하나는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분별할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는 소극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참된 것으로 밝혀진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적극적인 측면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르며 무엇이 진정으로 참되고 거짓된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마음의 위안을 찾아 서둘러 자기를 무엇에 떠말기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영생을 바라며 인생의 고해를 절감해보지도 않고 해탈을 원한다.
이와같이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종교에 다가가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으며 이것은 또한 몰지각한 사람들이 무수한 사이비 종교를 만들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
이 경우 철학은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좀더 기울여 볼 것을 가르치며 무엇이 진정한 종교고 또 무엇이 사이비종교인지를 분별할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고자 한다. 경험과학이나 상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철학은 경험과학들이 전제로 하는 원리들이 과연 합리적으로 정당화된 것들인지를 점검하며 그 결론들이 서로 모순되고 있지나 않은지를 살핀다.
이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예를 들어 화학과 연금술의 차이를 밝혀낸다는 것이다. 또한 철학은 상습적으로 통용되는 관습이나 이념이 진정으로 지켜질 가치가 있는지, 혹은 권위나 권력에 의해서 미화된 것인지를 판단할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이러한 기능들을 우리는 철학의 소극적 유용성이라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영원한 「질문의 학」>
한편 철학의 적극적 유용성은 일단 참된 것으로 밝혀진 가치에 대해 합리적인 근거와 의미를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 진정한 종교라면 철학은 여기에 우리가 안심하고 귀의할수 있는 이유를 제공하며 타당한 원리를 전제로한 과학적 발견에는 그것이 함축하는 의미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미 상식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관습이나 이념도 권위나 권력에 의해서 강요되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합리적인 근거를 제공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물론 철학이 이러한 임무를 항상 완전히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며 그러한 이유로 철학은 영원히 「질문의 학문」으로 남아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만이 인간을 영원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철학자들은 굳게 믿고 있으며 그래서 철학(Philosophia)은 그리스어 어원이 보여주듯이 지혜(sophia)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갈구 혹은 사랑(Philia)하고 있을 뿐인 학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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