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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위기관리능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부산에서 일어난 대아호텔화재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것을 생각케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를 괴롭히는 충격은 어째서 같은 유형의 사고가 되풀이 되어야만 하는가이다. 보도에 따르면 문제의 호텔은 신축후 5년동안이나 준공검사를 받지 않은채 가사용 승인을 얻어 영업해오다 2년전 뒤늦게 준공검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또한 안전관리면에서도 허점투성이인 것으로 나타났다. 화재가 나면 즉각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스프링쿨러나 자동화재탐지기의 시설도 형식적인 것이었고 인화성 강한 내장재에 불연재가 입혀져있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옥내의 소화전도 재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더우기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이와같은 변칙적 영업행위와 시설상의 문제점을 관할기관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1백65명의 생명을 빼앗아간 71년의 대연각호텔 화재와 88명의 인명을 희생시킨 대왕코너 화재에서도 이와 유사한 시설상의 문제점과 관할기관과의 유착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후 10여년이 지난 오늘날 사람들은 수출규모와 l인당 국민소득에서 놀랄만한 발전을 하여 소위 중진국권에 들어가 있음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는 이번에 다시한번 반복적인 충격에 접하면서 또하나의 근본적인 의문, 즉 위기관리능력에 대한 불안감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그것은 현대기계문명에 대한 적응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리는 현재 여러 측면에서 심각한 도전을 받고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도전에 대비한 일련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고 실제로 훈련을 통해 유사시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제도와 훈련이 우리가 기대했던 바대로의 유비무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주어진 제도나 훈련계획이 아무리 훌륭하게 짜여져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이들의 효율성과 성패는 관계하는 사람들의 정신상태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는 위기관리제도와 이에따른 훈련이 잘 운영되고 있는것 같이 보고되지만 이것이 실적위주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해서 실제로 상황이 벌어졌을때 관계자들이 뺑소니치기에 바쁘고 책임을 전가시키기에 급급한다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진다.
오늘날 동서진영이나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정치가들이 한결같이 내세우는 슬로건은 「경제성장」이다. 잘사는 나라 사람들은 더욱 잘 살아야겠고 아직 잘살지 못하는 나라 사람들은 잘살기위해 노력해야겠다는 것이다. 우리도 이와같은 유행성 성장만능병에 걸린채 이미 두연대를 보냈다.
따지고 보면 잘 살아보아야겠다는 것 자체에 거부반응이 있을수는 없다. 문제는 「무조건」이 아닌 「어떻게」 잘살아야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하나의 중대한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찬미하고 있는 발전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발전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도처에서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양적성장 위주의 발전이 추구될수록 사회의 물체화현상은 가속화되고 그속에서의 인간은 더욱 비인문화되며 그의 내적삶은 더욱 공허해지기 때문이다.
이번 화재사고에서도 손님들의 안전대피임무에 정작 책임을 져야할 호텔종업원과 간부들은 자기 한목숨만을 소중하게 여긴 나머지 모두 도망치기에 바빴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한심한 기업윤리요, 직업의식이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간에 나만 잘먹고 잘살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지극히 반사회적인 개인주의와 이익추구욕이 바탕된 때문이다. 「프란츠·피펜하임」은 이와같은 현대인의 탐욕스러운 기업윤리와 직업의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너무 열심히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있기때문에 그가 현실에서 만나는 현장은 모두 이러한 자기이익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는 모든 경험을 대상물, 즉 자기의 이기적 목적달성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는 강한 욕구에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아마 자본주의사회가 가장 경계해야할 내부의 적도 바로 이러한 인간의 도덕적 타락일 것이다. 로마가 멸망한 것은 외부의 적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고 건전한 시민의 상식으로는 상상을 초월하는 장여인 사건이나 명성사건, 그리고 영동개발사건 등도 결국 우리사회의 도덕적 가치기준이 어느 정도나 오염되었는가를 예시하는 단면들이다. 실로 우리는 이와같이 패덕한 상업주의에 대해서 혐오감과 구토증을 느낀지 오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고있는 모든 부정적이고 허점투성이인 사회현상의 대부분 양적 성장 일변도의 정책이 초래한 부산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제성장자체를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이 1차원적인 성장 이데올로기를 인간의 생명이 존중되고 품위있는 삶이 보장되는 인간주의적 성장으로 궤도수정을 할수 있을까 하는데 있다. 아무리 사회가 발전하고 국가가 선진화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이 정시되고 인권이 무시된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발전이요, 선진화다. 이번 대아호텔 화재사건의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만약 이러한 화재가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 발생했을때도 그와같이 많은 희생자를 내었을까 하는 가슴아픈 가정을 해보았다. 성장이나 발전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보다 절실한 것은 현대문명에 대한 관리능력을 키워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김윤종 <성대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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