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던 박정희 작전정보실장은 6·25 남침 당시 구미 고향 집에 있었다. 그가 화물차를 얻어 타고 서울에 도착한 건 27일 오전 7시. 그 시점부터 28일 오후 5시 수원에 마련된 임시 육본에 그가 나타날 때까지 ‘박정희 문관’의 34시간 행방은 정보국의 큰 관심이었다. 김종필 중위는 정보국 북한반장이었다. 박 실장은 49년 숙군(肅軍) 때 남로당 연루 혐의로 사형 구형을 받고 강제 예편됐다.
박 실장이 한강을 건너 수원 육본에 나타나면 좌익 의혹을 씻을 수 있는 반면 나타나지 않으면 의혹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김종필(JP) 전 총리는 중앙일보 증언에서 “28일 새벽 한강 다리가 폭파돼 나는 바지선으로 강을 건너 수원까지 걸어갔다. 박정희 문관이 나타나주길 간절히 바랐다. 오후에 육본에 도착하니 박 전 대통령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휴~ 빨갱이는 아니었구먼요.’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고 회고했다.
전영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