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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파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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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범죄수사는 거짓말과의 싸움이다. 수사관은 범행을 추궁하고 범인은 이를 감추려 한다. 물증이 없는 경우 범인의 입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입을 연다 해도 어디까지 진실인지 헷갈린다.

1920년대 도입된 거짓말탐지기는 심장박동이 빨라지거나 식은땀이 흐르는 등의 생리적 변화를 감지해 범인의 거짓말을 간파하려는 용도였다. 하지만 새빨간 거짓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대는 범인 앞에서 탐지기는 무용지물이다. 가슴 여린 소심한 사람이 엉뚱한 혐의를 뒤집어쓸 수도 있다.

그래서 범죄심리학자들은 뇌에 관심을 갖게 됐다. 범인의 뇌 속에 남아 있는 범행 계획.실행.기억을 추적해 진술의 진위를 가려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뇌 속에는 100억 개가 넘는 신경세포가 촘촘히 연결돼 전기신호를 주고받는다. 뇌파(腦波)다. 뇌는 눈을 감고 있을 때, 정신을 집중할 때, 잠을 잘 때 등 활동상태에 따라 다른 뇌파를 발생한다.

미국의 로런스 파웰은 91년 '뇌지문 감식(Brain Fingerprinting)'이라는 뇌파분석기법을 발표했다. 용의자의 머리에 10개의 미세 전극이 내장된 장치를 씌우고 범행 현장이나 흉기 등을 컴퓨터 화면으로 보여주며 뇌의 반응을 측정했다. 뇌가 친숙한 그림이나 글자를 지각하면 0.3초 뒤 특정 뇌파(P300)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일반적인 칼에는 반응이 없다가 범행 도구를 보는 순간 뇌파가 급격히 증가하는 것이다.

뇌파분석은 2001년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다. 당시 파웰은 살인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한 흑인 청년의 뇌파를 증거로 제시하고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 흑인의 뇌가 범행장면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그가 알리바이로 내세운 음악회 관람과 관련된 문장에 P300 뇌파를 일으켰다고 했다. 뇌파분석의 정확도는 90% 이상이다. 현재 연방수사국(FBI).중앙정보국(CIA) 등 미국에서 범죄수사에 널리 쓰인다.

우리 검찰과 경찰이 미궁에 빠졌던 살해사건에 뇌파분석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보험금을 타려고 독극물로 친딸을 살해한 비정한 여성이 뇌파에 걸려 구속됐다. 범인들이 묵비권으로 무작정 버티던 시절은 지났다. 범행 흔적을 지우려 해도 뇌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천기'를 누설하기 때문이다. 용의자를 을러대 엉터리 자백을 받아내는 수사관행이 사라지길 기대해 본다.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