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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품에서 쏟아진 11개 '혁명 포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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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30분 KBS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간 군사혁명위원회 발표문은 ‘혁명공약’(사진)과 11개의 ‘포고문’이었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의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혁명취지문)

 군사혁명위원회는 이어 ①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다 ②유엔헌장을 준수하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④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⑤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요지의 공약 6개 항을 발표했다.

 마지막 대목은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이다. 혁명공약과 11개 포고문은 군사혁명위원회 장도영 의장 명의로 발표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JP가 작성해 품 안에 품고 다니다가 상황에 맞춰 차례로 방송에 내보냈다.

 육군 소장 박정희는 장도영을 5·16의 간판으로 내세웠다. 장도영은 박정희보다 6살 아래지만 육군 정보국장 시절 박정희 당시 문관(文官)을 현역으로 복직시킨 장본인이었다(50년 7월). 5·16 당시 장도영은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장도영은 5·16 당일 박정희에게 출동 병력을 복귀시키라고 요구하다가 오히려 박정희에게 설득당해 그날 오후 의장직을 수락했다. 이후 장도영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내각 수반, 국방부 장관, 육군 참모총장, 계엄사령관을 겸임했다.

 JP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인 61년 7월 반혁명 혐의로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을 체포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에게 사전 보고하지 않고 저질렀다. JP는 “장도영을 그냥 두면 혁명이 파괴될 우려가 있었다. 더 크기 전에 잘라야 했다”고 말한다.

한애란 기자

● 인물 소사전 장도영(1923~2012년)=5·16 군정(軍政)의 최고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초대 의장. 박정희는 스스로 부의장으로 내려앉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간판으로 내세웠다. 장 의장은 계엄사령관, 내각 수반을 포함해 5개 자리에 올랐다. 1961년 7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됐다. 63년 미국으로 건너가 93년까지 위스콘신대 교수로 재직했다. 일본군 학도지원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뒤 귀국해 군사영어학교(육사 개교 이전 장교 양성기관)를 졸업하고 국군 창군 멤버가 됐다.

● 1961년 5월 16일 계엄사무소가 설치된 서울시청 앞에 국가재건최고 회의 의장 겸 계엄사령관 중장 장도영(왼쪽)과 부의장 소장 박정희 부의장이 나란히 서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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