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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왜 까매" 묻지 않는 사회, 호주도 40년 걸렸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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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한국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호주는 안식처였다. “왜 까매?” “어느 나라 편이야?”라고 묻는 이가 없었다. 국제교류재단 청소년대사 자격으로 방문한 아이들이 골드코스트 해변에서 뛰어오르고 있다. [사진 국제교류재단]

대한민국은 이제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다. 신생아 20명 중 1명은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난다. 다문화가정 인구는 2020년 100만 명을 넘길 전망이다. 그러나 ‘단일민족’ 프레임은 여전히 견고하다. 그래서일까. 지난달 23일 국제교류재단(KF)의 ‘청소년 대사’ 자격으로 호주로 출발한 14명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은 스스로를 ‘비주류’로 표현했다. 백호주의(白濠主義)를 극복하고 다문화 선진국을 지향하는 호주에서 이들이 닷새간 보고 느낀 것은 무얼까. 글로벌 시민으로 성장할 KF 청소년 대사 세 명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아빠가 치마 못 입게 해 친구들이 바지교복 선물

마리엄 라자 (인천 간석여중 2학년)

 내 이름은 마리엄 라자. 한국인이야. 내 여권 커버는 ‘대한민국’이 찍힌 초록색이지만 내 피부는 짙은 갈색이야. 새 학년이 될 때마다 반 친구들은 “한국말 할 줄 알아?”라고 물어봐. “흑인으로 사는 건 어떠니”라고 수업시간에 물어보는 선생님도 있었지.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는데 선생님은 학기 내내 내게 차갑게 대했어. 그래도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지금은 나아진 거야. 어렸을 땐 집 밖에도 못 나갔어.

 하지만 날 불쌍하다고 생각하진 말아 줘. 내가 선택해서 다문화가정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태어났으니 열심히 살 작정이거든. ‘다문화’가 꼬리표가 아닌 혜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고마운 일도 많아. 보수적인 아빠가 “치마 교복을 입으면 사고가 날 수 있다”고 하니까 친구들이 나만을 위한 바지 교복을 제작해 줬어. 게다가 내가 입학했다는 이유로 학교엔 세계 각국 문화를 소개하는 ‘다문화실’까지 생겼거든. 어떤 친구들은 나를 ‘미래 전교 회장’이라고 부르고 선배들은 “네가 그 마리엄이구나”라며 반갑게 인사해 줘. 이렇게 호주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다문화가정이기에 누릴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해.

 근데 말이야, 호주에 오니 놀라운 것 투성이야. 여기 애들에게 다문화에 대한 생각을 물었더니 “다문화라는 구분 자체를 안 해. 우린 모두 같은 호주인이야”라고 답하는 거야. 충격이었어. 언젠가 한국도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오늘 밤에도 영어 단어 77개를 외우고 잘 거야. 내 꿈은 한국 출신 유니세프 소속 의사로 전 세계 아이들을 돕는 거니까.

파란띠 다문화 가정통신문, 빨리 사라졌으면

신유진 (부산 광안중 3학년)

 학교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2등을 한 적이 있어. 그런데 친구들은 “뭐야, 넌 1등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더라. 엄마가 필리핀에서 왔지만 난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자랐는데, 그 애들 눈에 나는 외국인인가 봐. 내 나름 열심히 공부해 대회에 나갔는데도 친구들이나 선생님은 당연한 걸로 받아들여서 서운해. 때론 너무 힘들다 싶을 땐 애들이 미워져서 “너희도 외국 나가서 똑같이 당해 봐”라는 마음도 들어.

 난 학교에서 ‘차이’가 ‘차별’이 된다고 느낄 때가 많아. 근데 그건 우리 아이들 잘못만은 아닌 것 같아. 학교에서 파란색 테두리가 쳐진 봉투에 넣어서 주는 ‘다문화가정 학생 가정통신문’이 바로 그런 경우야. 선생님이 그걸 건네주실 때마다 반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자기들과 다르다고 인식하는 것 같아. 그러다 보니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도 뭔가 어색해.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는 나라를 위해 어떻게 충성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슬퍼져. 나 같은 다문화가정 친구들은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자주 생각하곤 해.

그런데 호주에 와 보니 새 세상이 있는 것 같아 해방감이 들어. 왜 그럴까 궁금했는데, 호주는 1975년에 ‘다문화주의’를 공식 국가 정책 기조로 정하고 89년엔 ‘다문화 호주’를 국가 어젠다로 설정했다고 하더라고. 2007년까지는 ‘이민·다문화부’라는 이름의 정부 부처까지 있었대. 지금도 4명 중 1명이 호주 밖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래. 여기에선 “넌 피부가 까무잡잡하구나”라고 말하지 않아. 호주도 70년대까지는 백인만 우대하는 사회였는데 바뀐 거잖아. 한국도 바뀔 수 있기를 바라.

“한·일전 어디 응원해” … 난 한국인인데 왜 물어 

한문희 (광주 조선대부속여고 1학년)

 난 있잖아, 한·일 축구전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 엄마가 일본인이어서 애들이 “넌 어디 응원해?”라고 꼭 묻거든. 이젠 대답을 안 해. 한국이라고 답하면 “근데 넌 일본인이잖아”라고 하고, 일본이라고 하면 “넌 역시 일본 편이구나”라고 하니까.

 다른 다문화가정 아이들과는 달리 난 외모로는 한국인과 구분할 수 없어.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텐데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선생님들은 “여러분, 문희 엄마는 일본에서 오셨어요”라고 얘기하셔. 그 순간부터 질문공세가 이어지지.

“넌 독도가 어디 땅이라고 생각해?”는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야. 역사 시간에 일본 얘기가 나오면 괜히 얼굴이 붉어져. 내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아니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도 아닌데 애들은 “일본이 잘못했잖아. 사과해”라고 닦달해. 그럴 때마다 난 내가 좋아하는 교실 뒷구석 자리로 가서 고개를 푹 숙여. 이러다 보니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부르긴 솔직히 어려워. 그 대신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한국도 일본도 결국 같은 지구에 있잖아. 우리는 같은 ‘지구인’이라고.

 한국도 몇 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어. 예전만큼 폐쇄적이지도 않다는 걸 피부로 느껴.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가정 출신이라서 받는 혜택도 많아. 시간이 지나면 한국도 다문화 선진국 호주처럼 바뀔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생겼어. 그럼 나도 대통령처럼 높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이야 공부보다 만화책 읽는 게 더 좋지만.

브리즈번·시드니=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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