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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해결사’ 이병기 … 소통·대일 관계 해결 기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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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호 03면

지난해 7월 국정원장 임명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이병기 국정원장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고 있다. 8개월만에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앙포토]

장고 끝 악수인가, 정국 돌파 묘수인가.

[2.27 청와대 개편 이후] 신임 비서실장 인선 의미와 파장

이병기(68)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판단 기준은 ‘인간 이병기’를 아느냐 모르느냐였다. 지난달 27일 임명 이후 중앙SUNDAY는 그를 알 만한 인사 10여 명에게 이 신임 비서실장에 대한 품평을 물어봤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 정부 들어 최고의 인사”라는 극찬이었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 저격수를 자처하는 박지원 의원마저 “내가 국회 정보위원 하면서 상대해 봤는데 사고가 유연하더라. 소통도 원만하다. 지금까지 (비서실장으로) 거론된 사람 중엔 가장 낫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그를 모르는 이들의 평가는 싸늘하다. “이병기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인사 쇄신으로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을 바꾸라는 게 여론의 주문이었는데 또 측근을 갖다 썼으니 말짱 도루묵”이라는 지적이다. 일반 국민에게도 이 신임 실장은 낯설다. 2002년 ‘차떼기’ 파문으로 알려진 대선자금의 전달책으로 벌금형을 받았다는 게 그나마 시중에 알려진 정보다. 정보 수장이 청와대에 입성했다는 것도 영 꺼림칙하다. “정보정치·공안정치의 망령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걱정된다”(새정치민주연합 김영록 수석대변인)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비서로 최적화된 캐릭터”
정보기관 수장인 국정원장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곧바로 갈아탄 건 역대 처음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 점을 고심했다고 한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때 김계원 비서실장이 중앙정보부장 출신이긴 하나 8년의 공백이 있었다. 이후락씨는 비서실장 이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중권(76)씨는 “국정원장을 했다는 것만을 갖고 공작 운운하는 건 지나친 형식 논리”라고 반박했다. 그는 “그럼 검찰총장이 비서실장 되면 사정정국, 국방부 장관이 가면 군부독재라고 공격할 것인가”라고 덧붙였다. “핵심은 비서실장 임무를 잘할 수 있느냐다. 이 비서실장은 국정원장을 지냈지만 기본적으론 외교통”이라고 평가했다. 자신과의 일화도 소개했다. “1990년대 초 내가 청와대 정무수석 할 때 이 비서실장은 의전수석이었다. 1년간 같이 근무했다.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주로 경청하는 스타일이었다. 소통이 부족하다는 박근혜 정부의 약점을 보완할 적임자”라고 진단했다.

검사 출신이며 3선의 국회의원이었던 전임 김기춘 비서실장이 ‘실세형’이었다면 외교·안보에 정통한 이 신임 실장은 대체로 ‘실무형’이라는 시각이다. 하지만 명지대 김형준(정치학) 교수는 “정무감각도 탁월하다”고 평가했다. “김무성·유승민 현 여당 지도부와 호형호제하는 건 물론 고(故) 김근태 의원, 조영래 변호사 등 야권 인사들과도 각별했다. 90년대엔 김민석 의원 등 이른바 ‘386’ 세력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간 여의도 정치와 일정 정도 거리를 두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이 실장을 택한 건 향후 국정운영에서 정치를 우선 순위에 두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분석했다.

국정원 1차장을 지냈던 전옥현(59) 서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는 “삼박자를 두루 갖춘 인물”이라며 “첫째, 대북·국제정세·국내현안 등 국정 전반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둘째, 인화력이 뛰어나다. 셋째,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어 내부 사정에 밝다. 공직 기강을 확실히 잡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좋든 싫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비서로 최적화된 캐릭터”라고 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은 채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 ‘고요한 해결사’로 불리기도 한다.

이 신임 실장이 과거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경력을 쌓았다는 점도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흔히 ‘물태우’로 알려졌지만 노태우 정부는 역대 정권 중 비서실·내각 운영과 관련해 가장 민주적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례로 노태우 정부 초대 이현재 국무총리는 전 부처의 차관을 본인이 직접 임명하기도 했다. 한국행정연구원 김정해 연구원은 2013년 ‘대통령 비서실의 기능과 역할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역대 청와대 비서실 운영을 ‘권한집중형’과 ‘권한위임형’으로 구분했다. 분석 결과 노태우 정부는 권한위임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김 연구원은 “당시 군림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불식시켜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도 있었겠지만 노 대통령의 스타일 자체가 정책결정 권한을 상당히 아래로 위임하고 책임도 함께 부여하는 유형이었다”고 분석했다. 전옥현 교수는 “그런 경험 때문인지 이 신임 실장은 청와대 운영의 민주성에 대해 누구보다 신념이 확고하다”고 전했다. 여당 내에서 “문고리 3인방이 제대로 임자 만났다”란 소리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유다.

주일대사 시절 ‘말이 통하는 사람’ 평가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2013년이었다. 당시 이병기 주일대사가 원전 피해를 본 후쿠시마를 방문했다. 한국산 삼계탕 1500봉지를 준비해 갔다. 피해자 숙소를 찾아갔는데 60대 이상 노인들이 ‘뭔 일로 들렀나’라며 뜨악한 표정이었다. 그때 이 대사가 87세 최고령자 할머니를 찾아가 ‘저를 아껴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이와 똑같으시다. 꼭 제 할머니 같다’며 손을 꼭 잡았다. 순간 냉랭하던 공기가 일시에 풀렸다. 다들 맛있게 삼계탕을 드셨다.”

박철희 서울대 일본연구소장도 “외교관 이병기는 외교전에서 싸울 때 싸울 줄 아는 장수였지만 기본적으로 대화 채널을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해 주일대사에서 국정원장으로 임명되자 일본 정부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의 대일 강경 노선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루트가 사라졌다”며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이 때문에 이 비서실장의 임명과 함께 경색된 대북·대일 관계에 변화가 있을 것이란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동국대 김용현(북한학) 교수는 “안보 논리를 앞세우기보단 가능한 한 대화로 풀려는 경향이 강한 인물”이라며 “남북관계가 다소 유연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비서실장으로서 정치적 쇄신 이미지를 부각하기엔 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대통령학연구소 부소장인 임동욱(한국교통대 행정학) 교수는 “쓸 만한 사람을 깜짝 발탁했다는 건 알겠지만 과연 국민이 원하는 ‘혁신’에 부합하는 인물인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이 신임 비서실장이 스스로 풀어가야 할 숙제다.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국민대 김병준(행정학) 교수는 “산업구조 개혁, 노동시장 재편 등 산적한 현안이 당면한 첫 과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동욱 교수도 “뚜렷한 성과를 이끌어내야 하지만 드러나선 안 된다는 비서실장의 제1 덕목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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