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준비 안 된 '퇴직 혁명'] 상. 기업담당자 "정보 없어 헷갈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9일 민간 기업을 대상으로 서울에서 열린 '퇴직연금 로드쇼' 참석자들이 행사장 입구에서 나눠주는 설명 책자를 앞다퉈 받으려 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경기도 안양시에서 중소기업을 상대로 보험 영업을 하는 김모씨는 이달 초 처음으로 퇴직연금 교육을 받았다. 나름대로 틈틈이 공부했지만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김씨는 "퇴직연금을 유치해야 하는데 기업 담당자의 질문에 자신있게 답해줄 수 없어 고민"이라며 답답해 했다.

정부가 야심작으로 내놓은 퇴직연금제는 '21세기형' 노후 보장 제도다. 40여 년간 유지돼 왔지만 연간 체불액이 5000억원이 넘는 등 '불안한' 퇴직금 제도를 대체.보완하자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그러나 아직 세제 지원 여부 등 세부 시행 지침이 마련되지 않은 데다 상품도 확정된 게 없어 시행 초기부터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기업이든 근로자든 막상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해 하는 분위기다.

당장 퇴직 원금을 투자하고 운용하는 책임을 회사가 지느냐(확정급여형), 아니면 근로자가 지느냐(확정기여형)를 놓고 노사 간 또는 노노 간 갈등이 생길 수 있다. '퇴직용 원금'을 주식 투자 등을 통해 불리는 것을 두고 반대하는 직장인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풀어 가려면 무엇보다 홍보와 교육이 시급하지만 정부는 "알 만한 사람은 웬만큼 안다"면서 이를 소홀히 하고 있다.

퇴직연금 전문가인 김성일씨는 "제대로 정착되면 불안한 국민연금을 보완할 최고의 노후 대책이 될 것"이라며 "정부는 물론 기업과 근로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퇴직연금이 뭡니까"=대다수 직장인은 기초 정보에도 어두웠다. 본지 설문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퇴직연금제도를) 들어는 봤지만 뭔지 모르겠다'(50.5%)고 응답했다. '전혀 모른다'도 세 명 중 한 명(32.2%)꼴이었다.

▶근무 연수가 낮을수록▶다니는 회사의 규모가 작을수록 퇴직연금에 대해 몰랐다. 좀 안다는 근로자도 대부분 '수박 겉핥기 수준'이었다. '퇴직연금을 안다'고 답한 이들 중 70% 이상이 자금운용의 기본 개념인 확정급여형과 확정기여형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각 회사 퇴직연금 담당자도 정보에 목말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룹사 차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A기업 담당자는 "여러 금융회사에서 와 교육을 했는데 별 도움이 안 됐다"며 "구체적인 내용을 물으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대답뿐이었다"고 말했다.

◆ "제도 도입이 겁난다"=퇴직연금제의 문제점으로 '투자에 따른 위험성'을 꼽은 이가 31.7%로 가장 많았다. 퇴직연금 재원을 (주식 등에) 투자했다가 혹여 원금을 까먹을까 걱정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은 노후 대책으로 주식투자(13.6%)보다 부동산(39.6%)이나 은행 예.적금(39.4%)을 선호했다. '기존 퇴직금제도를 바꾸는 게 귀찮다'(23.7%)거나 '정보나 교육이 부족하다'(22.5%)는 것을 문제점으로 꼽은 근로자도 많았다. 중소기업인 H기계 인사 담당자는 "골치 아프게 바꿀 필요 없이 기존 퇴직금제도를 유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런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퇴직연금의 조기 정착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퇴직연금이 증시의 자금줄 역할을 해 주가가 오르고, 오른 주가가 퇴직연금의 고수익을 뒷받침하는 선순환 시나리오가 작동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기협중앙회 조유현 실장은 "막상 시행에 들어가면 문제나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나올 것"이라며 "그때 가서 땜질식 처방을 하다가는 국민연금의 실패를 되풀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정부와 기업이 팔 걷고 나서야=건설자재 업체인 D사의 경리과장은 "실무적인 절차나 구체적 내용을 알아야 퇴직금과 퇴직연금을 비교해 볼 텐데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어떤 게 좋은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직장인의 71%는 신문.방송.인터넷을 통해 퇴직연금과 관련된 정보를 얻고 있었다. 정부 홍보를 통해 정보를 얻는 비율은 크게 낮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퇴직연금 관련 정보를 들어본 적이 있다는 응답은 대기업 근로자(74.8%)가 중소기업 종사자(55.7%)보다 많았다. ▶여성(7.6%)보다는 남성(22.7%)이▶판매나 기능직(8.3%)보다는 경영 관리직(30.8%)이▶소득이 높을수록 관련 정보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인재 (법학)상지대 교수는 "제도 도입 초기에는 정부가 나서 적극적으로 교육과 홍보를 하는 것이 근로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할 말은 많다. 문제점도 알고 개선 노력도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노동부 관계자는 "제도 정착을 위해 내년부터 300인 이하 영세기업을 대상으로 퇴직연금 컨설팅 비용의 일부를 보조해 주는 예산을 국회에 상정해 놨지만 이마저 통과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어떻게 조사했나
직장인 1000명, 인사.노조담당 140명 설문

이번 설문조사는 11월 3~9일 5일간(공휴일 제외) 진행됐다. 직장인 1000명 외에 기업 인사 담당자와 노조 담당자 70명씩을 별도 설문조사하는 등 모두 1140명을 대상으로 했다. 본지와 세계적 금융회사인 피델리티가 공동 기획하고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유니온조사연구소가 조사를 맡았다.

유의할당추출법(Purposive Quota Sampling)에 따라 조사 대상을 선정해 전화와 팩스로 조사했다. 설문 내용은 국내외 퇴직연금 전문가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했다.

일반 직장인에 대한 설문조사는 서울을 포함한 6개 지역(인천.경기.부산.광주.울산.포항)에 거주하는 성인 남녀(만 20~59세) 1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기업 인사 담당자와 노조 간부는 각각 대기업.중견기업.소기업으로 분류한 뒤 전화와 팩스 조사를 병행했다.

노조 간부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에선 전체 응답자 네 명 중 한 명꼴(27.1%.19명)로 노조위원장이 직접 응답했다.

표준오차는 ±3.1%, 신뢰 수준은 95%다.

◆ 유의할당추출법=모집단이 한정돼 있으면서 지역별.성별.연령별 분포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대상자를 선별하는 방법.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구분한 이번 설문조사처럼 모집단 내에서 따로 대상자를 분류하는 조사에 많이 쓰인다.

퇴직 연금, 이것이 궁금
Q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나
A 노사 합의로 선택 가능

퇴직연금은 어떤 방식, 어떤 상품을 택하느냐에 따라 나중에 챙길 은퇴자금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얼마만큼 제도를 잘 이해하고 있느냐가 20, 30년 뒤 노후 대비의 성패를 가르는 셈이다.

①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나

-아니다. 노사 합의(노조 결정 또는 근로자 과반수 찬성)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근로자끼리 의견이 갈리면 한 회사에서 기존 퇴직금과 퇴직연금 제도를 동시에 실시할 수도 있다. 다만 근로자는 그중에서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한다. 12월부터는 5인 이상 회사만 도입 가능하지만 2008년 이후는 전 사업장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②어떤 방식이 유리한가

-확정급여형(DB)과 확정기여형(DC) 두 종류가 있는데 DB형은 근로자가 나중에 받을 연금 총액이 미리 정해져 있다. 자금 운용도 회사가 책임진다. 직장인에겐 사실상 기존 퇴직금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자금 여력이 풍부하거나 퇴직 원금을 잘 굴릴 자신이 있는 회사에 좀 더 유리하다.

반면 DC형은 기업이 부어야 할 부담금(연간 임금총액의 12분의 1 이상)은 미리 정해져 있고 근로자 개개인이 자금 운용을 책임진다. 나중에 챙기는 적립금도 개개인마다 달라진다. DC형은 돈이 모두 회사 밖에 적립되기 때문에 회사가 망해도 지급엔 문제가 없다. 따라서 연봉제를 도입했거나 기업 경영이 어려워 퇴직금을 떼일 우려가 있는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에겐 DC형이 더 유리하다.

경제단체와 재계는 DC형을, 노조단체 등 근로자 측은 DB형 도입을 더 선호하고 있다.

③퇴직금 중간정산을 해야 하나

-안해도 된다. 기존 퇴직금을 퇴직연금 계좌(DB형.DC형 모두 해당)로 넘겨 연금화할 수 있다.

④일시불로도 받을 수 있나

-기존 퇴직금처럼 원하면 일시금으로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다달이 연금 형태로 받는 게 세제혜택 등에서 더 유리하다.

⑤퇴직연금 재원은 누가 부담하나

-원칙적으로 기업이 부담한다. 다만 DC는 근로자가 원하면 추가로 자기 돈을 낼 수 있게 했다. 이 돈은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다. 한도에 대한 규정은 아직 없다. 정부는 개인연금저축과 합산해 300만원까지만 소득공제 해준다는 방침이다.

⑥개인퇴직계좌(IRA)란

-퇴직용으로 붓는 자금을 따로 관리할 수 있게 한 금융 계좌다. DC에 가입한 근로자의 경우 IRA가 있으면 직장을 옮겨도 퇴직급여를 계속 부을 수 있다. 퇴직금을 받은 사람이나 퇴직연금 대상자만 가입 가능하다.

특별취재팀 : 표재용.이승녕.김영훈 기자<pjyg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