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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안 된 '퇴직 혁명'] 상. 직장인 83% "잘 모르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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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노동부 담당자의 설명이 시작됐지만 설명회장 밖에선 자료를 받지 못한 참석자들과 행사 관계자들의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었다. 설명회장에는 임시 좌석이 황급히 마련됐지만 100여 명은 선 채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주최 측이 예상한 참석자(300명)의 세 배가 넘는 1000여 명이 몰렸기 때문이다. 일부는 분통을 터뜨리며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한 중소기업 인사 담당자는 "경기도 광주에서 두 시간 걸려 왔는데 자료집도 못 받았다. 정부에서 실무에 도움이 될 만한 안내 책자 한번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참석자는 "퇴직 연금제로 바꾸려 해도 뭘 알아야 할 것 아니냐"며 답답해 했다. 이날 행사는 민간기업을 대상으로는 서울에서 열린 처음이자 마지막 설명회였다.

◆ 너무 모른다=다음달 1일에 퇴직연금 제도가 시작된다. 40년간 지켜온 퇴직금 제도를 완전히 뜯어고치는 '퇴직 혁명'이 코앞에 닥친 것이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여전히 퇴직연금이 뭔지 아예 모르거나 시큰둥하다.

기업들도 대책 없이 정부의 지침만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웬만한 기업은 다 안다"며 홍보나 교육에 소극적이다. '근로자 퇴직급여 보장법'이 입법예고 기간(2003년 9월 24일~10월 14일)을 거쳐 올 1월 27일 공포됐으나 지금껏 민간기업 대상 설명회는 대도시 7곳에서 한 차례씩만 열고 있을 뿐이다.

중앙일보가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피델리티와 공동으로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최근 실시한 조사에서 퇴직연금 제도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응답자는 17.3%에 불과했다. 열 명 중 네 명(43.9%)은 다음달부터 제도가 시행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정부 부처의 홍보를 통해 정보를 얻었다는 답은 5%에 불과했고, 퇴직연금 관련 사내교육을 받은 직장인은 열 명 중 한 명도 안 됐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인 왓슨와이어트의 밥 찰스 퇴직연금 컨설턴트는 "기존 퇴직금제와는 전혀 다른 제도여서 어느 나라에서나 초기엔 거부감과 혼란이 있다"며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홍보와 교육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우리나라에선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과 불안이 매우 높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퇴직연금제가 초기에 자리를 잡지 못하면 앞으로 막대한 추가 비용과 시간을 들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한다. 자칫하면 근로자들은 매우 유용한 노후 대책 하나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러나 벌써 새 제도의 안착은 물 건너갔다는 지적도 많다. 본지 조사에서 직장인 다섯 명 중 세 명(61.5%)은 새 제도가 도입돼도 기존 퇴직금제를 유지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근로자 평균 근속 연수는 5.8년에 불과하기 때문에 통념처럼 뭉칫돈을 퇴직금으로 받는 것은 일부 장기 근속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 노사 갈등 가능성도=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더 만만치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퇴직연금제의 구체적인 방안은 기업별 노사 합의를 통해 정해야 하기 때문에 노사 갈등의 새 불씨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기업 퇴직연금 담당자 및 노조 간부 각각 70명을 대상으로 한 별도 설문조사에서 노조 간부 두 명 중 한 명, 기업 담당자 세 명 중 한 명이 퇴직연금제가 노사 갈등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제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노사 간 힘겨루기로 흐르게 되면 미국의 GM처럼 막대한 '퇴직연금 부채'가 쌓여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창환 퇴직연금 컨설턴트는 "일본도 연금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금 재생'이란 목표를 내걸고 정.재계가 뭉쳐 3년여간 대대적인 홍보와 교육을 실시해 사회적 난제를 해소했다"고 설명했다.

김진수(사회복지학) 연세대 교수는 "근로자들이 퇴직연금제도를 믿고 선택할 수 있도록 확실한 안전장치와 청사진을 제시하고, 기업이 능동적으로 제도를 바꿀 수 있도록 실질적인 유인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 표재용.이승녕.김영훈 기자<pjygl@joongang.co.kr>

◆ 퇴직연금제란=다음달부터 직장인들은 노사 합의를 거쳐 기존 퇴직금이나 퇴직연금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연금제는 근로자가 퇴직할 때 받을 돈을 미리 정해놓고 기업이 알아서 돈을 굴린 뒤 정액을 지급하는 형태와 기업이 매달 돈을 내되 근로자가 알아서 돈을 굴리는 방식이 있다. 연금은 55세 이상, 가입 기간이 10년 이상인 경우에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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