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877)제80화 한일회담(76)-미국의 중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미국측의 한일회담재개를 위한 집요한 권유와 조정활동에 못마땅해하던 이대통령의 분노는 54년7월27일「아이젠하워」미국대통령과의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극적으로 폭발했다.
후술할 터이지만 미국의 조정활동이 「아이젠하워」대통령을 통해 최고도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박사는 그렇지 않아도 미국이 53년 말부터 54년 봄까지 끈질기게 진행해온 막후공작을 내심 불쾌하게 여겨온 터였다.
미국 측은 한일회담재개를 위해 53년12월 상순에는 양측에 구체적 조정안을 내밀고 받아들이도록 촉구했던 것으로 알고있다.
미국은 한일양자가 회담재개에 합의한다고 동의하는 공동성명을 내도록 노력했다. 물론 미국도 이 성명에 참여하는 조건이었다. 미국은 성명을 통해 일본정부가 밝혀야할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일본정부는 △한일회담이 「양측으로부터 상호간의 권익을 방기」하는 기반 위에서 재개된다는 것 △한국인에게 당연히 지불해야할 연금·미불봉급 등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 것△한국의 국보적 미술품을 반환할 것 △상호간의 원만한 화해에 도달키 위해 촉발적인 어로문제를 토의할 것 등에 동의한다.
미국 측은 또 한국 측에 대해서는 한국이 △상호간의 권익을 방기한다는 일본정부측의 제의를 만족하게 접수 할 것 △공해상에서의 어로문제에 대해 상호간에 화해할 용의가 있다는 것 △회담이 재개될 때 분쟁의 수역에서 나포된 일본 배 중 적어도 해상보안청소속 경비정을 석방할 것 등에 동의해야할 것 등을 제안했다.
미국 측은 이와 동시에 회담당사자가 아니지만 『양측에 충고를 하며 건의할 수 있도록 한일정부가 동의할 것』을 요구해 회담에 상당히 관여할 뜻을 시사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국무성은 54년 봄 워싱턴에 막 부임한 제1차 한일회담 일본측 수석대표였던 「이구찌」 주미일본대사와 양유찬 주미한국대사로 하여금 회담재개를 위한 협상에 임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역시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이에 「아이젠하워」대통령은 한국휴전후의 전후처리문제를 협의키 위해 이박사를 백악관에 초청한 자리에서 한일국교정상화문제를 꺼내 이박사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다음은 54년7월27일 상오10시부터 1시간30분 동안 백악관대통령집무실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양대사의 회고다.
『회의가 시작되자 마자 한일국교문제를 둘러싸고 두 대통령간에 이견이 노출됐다.
이대통령은 한일회담석상에서 「구보따」일본측 대표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가 유익했다는 등 망언을 했는데 그런 일본과 어떻게 국교를 정상화시킬 수 있느냐고 국교정상화반대를 주장했다.
「아이젠하워」대통령은 이대통령의 말을 듣고 나서 옆에 앉은 「덜레스」 국무장관을 보면서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덜레스」장관은 「구보따 발언으로 물의를 빚어 한일회담이 깨졌다.」 고 설명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시 「과거 일이야 어떻든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이박사에게 한일국교정상화를 권유했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내가 있는 한 일본과는 상종을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을 하자 「아이젠하워」대통령은 화를 내며(회담 중인데도) 일어나 옆방으로 들어갔다.
회담장엔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이박사는 옆방으로 나가는 「아이젠하워」대통령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런 고얀 일이 있나, 저런…」이라면서 흥분과 분노를 참지 못했다.
얼마 후 회담은 재개됐다. 그러나 너무 이견의 폭이 큰 한일국교문제는 토의를 보류하고 대한원조 문제를 집중적으로 협의했다.』
이박사는 출국 전부터 미국 측과 약간의 신경전을 벌였다. 이박사는 미국 측이 일본을 경유해 미국에 오도록 권유했으나 『일본 땅에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고 고집했다. 일본에 기착할 경우 자연스럽게 한일정상간의 대좌를 마련해보라는 미국 측 속셈이 깨져버린 것이다. 이대통령의 고집대로 비행기는 시애틀에 잠시 내려 급유를 받고 워싱턴으로 직행했다.
이대통령은 또 「덜레스」국무장관이 동북아지역의 집단안전보장을 위해 구상했던 NATO형의 태평양·아시아조약기구에 일본을 포함하자고 한데 대해 일본이 개입하는 집단안보체제는 극히 위험한 생각이라고 한마디로 거부해버렸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