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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박근혜 대표의 위험한 실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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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 대표의 발언이 동의안 처리에 자유투표 방침을 정한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영향을 줄 것임은 묻지 않아도 뻔하다. 지역구 표를 의식해야 하는 정치인들이 면피성 반대 내지 기권으로 갈 명분이 될 것이다. 찬성 당론을 내놓긴 했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는 일부 열린우리당 의원의 이탈이 가속화할지도 모른다. 만약 이번 국회에서 비준 동의안이 처리되지 못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박 대표에게로 몰아가려는 정치공세가 시작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이 나라 경제가 어려워진다. 동의안 처리가 지연된다고 해서 사실 농촌.농민이 덕 볼 게 없다. 오히려 고통스럽기만 하다. 그 이유를 박 대표가 아직도 모른다면 언젠가 대통령 후보로 나설 그의 이미지가 훼손될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직(職)을 걸고 쌀시장 개방을 막겠다'는 공약으로 엄청난 비용을 지출했다는 이야기는 지겨울 정도로 인용됐다. 임기 내내 세계시장이 그를 비웃었다. 그는 국제 외교무대에서 왕따당하면서 결국 쌀시장을 개방하고 말았다. 그의 정부는 농촌 구조조정에 엄청난 예산을 퍼부었지만 농촌은 더 어렵다고 야단이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아무리 땀을 흘려도 쌀의 국제경쟁력은 계속 떨어져 왔다. 우리보다 외국 농민들이 더 노력하며 더 좋은 쌀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갈수록 더 비싼 쌀, 그것도 세계시장보다 5~6배나 비싸게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영.호남의 농민도 서울.부산의 도시민도 만족하지 못하는 '쌀 보호정책'의 결과다.

박 대표는 상대적으로 국민의 지지도가 높은 야당을 이끌고 있다. 그가 농촌.농민 문제에 포퓰리즘적 대응을 한다고 해서 더 많은 유권자 표를 확보할 수 있다는 근거가 있는지 궁금하다. 정말 있다고 믿는다면 이를 냉정히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호남 표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은 헛된 것이 아닌지 높은 곳에서 펼쳐보았으면 한다. 설령 그의 라이벌들이 인기 위주의 발언에 나선다 하더라도 그는 경쟁 가능한 정책 비전으로 차별화 전략을 다듬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농민들은 결코 속지 않는다는 것을 정치인들은 늘 잊는다. 그들은 쌀시장 개방이 세계의 대세며 시대의 흐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단지 그들은 저항하고 힘이 부치면 길거리에 드러눕는 원초적인 의사표시에 의지할 뿐이다. 그들을 설득하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정치인이 드물다. 10여 년 이상 구조조정을 겪어온 농촌에 아직도 가난한 농가가 적지 않다. 정치인들은 빈농 이외에 부농이나 중산농은 거론하지 않는다. 부농의 그늘에 가려진 빈농의 실체를 파악하고 빈농 뒤에 숨어 있는 부농이 앞장서서 더욱 생산성을 높여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는 없는가. 박 대표는 우선 쌀협상 비준 동의안에 대한 애매한 입장을 철회해야 한다. 그것도 대통령 후보 수업이다. 우리는 확신 있는 정치가를 원한다.

최철주 월간 NEXT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