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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바깥에서 보는 한국

인정해야 할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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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에이단 포스터-카터
영국 리즈대 명예 선임연구원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했다. 잘한 일이다. 문 대표는 다음 대선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자신이 전 국민을 대표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안다. 문 대표가 말한 것처럼 이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건국했고, 박 전 대통령은 산업화에 착수했다. 팩트다.

 하지만 정청래 최고위원은 “유대인이 히틀러의 묘소에 가서 참배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왜 박 전 대통령은 보다 광범위하게 존경받지 못하는 걸까. 마이클 브린이 던지는 질문이다. 『한국인을 말한다』의 저자인 그는 1982년부터 서울에 살고 있다. 한국에 대한 일부 외부 세계의 태도에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다. 내게 이렇게 물었다. “과거 진보적 서구인들이 그들의 적인 공산국가보다 한국 같은 권위주의 동맹국들에 대해 보다 부정적인 성향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권위주의적인 통치자들이 주도한 경제 성장을 본능적으로 싫어한 이유는 뭘까.”

 좋은 질문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까다로운 질문이기도 하다. 대답하는 게 어렵고 또 당혹스럽다. 일부 서구 지식인은 과거 자신들의 이중잣대와 의도적인 멍청함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크게 보면 1960~70년대 식민지 독립 이후의 분위기가 있다. 민족 해방의 열기가 뜨거웠다. 우리는 프란츠 파농의 책을 읽고, 체 게바라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마오쩌둥(毛澤東)과 카스트로를 영웅이라 생각했다. 우리들은 하노이와 베트콩을 위해 데모를 했다. 사이공 정권은 무능한 꼭두각시였다.

 종속이론가들은 저발전의 원인이 자본주의라고 가르쳤다. 진정한 발전의 길은 제국주의 체제와 결별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데 있었다. 소련식 산업화가 암묵적인 모델이었다. 중국과 쿠바 또한 응당 해야 할 투쟁을 하는 나라로 인식됐다.

 마르크스주의자들뿐 아니라 중도 좌파도 이러한 태도를 공유했다. 카스트로와 마오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입각해 평가됐다. 반면 칠레의 피노체트는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였다(보수주의자들 또한 정반대의 이중잣대를 들이댔다. 그들에게 피노체트는 영웅, 넬슨 만델라는 테러리스트였다).

 서구 진보주의자들이 제3세계 권위주의 정권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든 이유가 두 가지 더 있었다. 수치심과 무지다. 폭압적인 독재자들을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들에게 위선이었다. 많은 이가 혐오감을 느꼈다. 얄궂게도 권위주의자들은 전체주의자들보다 더 세게 두들겨 맞았다. 권위주의자들은 그들의 범죄를 숨길 수 없었다. 반면 중국이나 북한의 수많은 희생자의 실상은 외부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은? 서구 지식인들의 뒤틀린 시각을 한국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국 상황을 우리 관점에 억지로 끼워 맞췄다. 박 전 대통령이 우리의 호감을 살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는 제국주의 일본을 위해 일했고,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반대파를 고문하거나 살해했다. 그는 미군을 주둔시켰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에 파병까지 했다.

 우리 중 일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북한에는 외국군이 없었고 한동안 한국보다 경제 성장이 빨랐다. 김일성 체제는 결코 좋아하기 힘든 체제였다. 하지만 미래의 ‘진정한’ 코리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옹호됐다.

 우리의 머리가 이런 난센스로 가득 찼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이 무엇을 성취하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82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발견한 것은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나라였다. 한국은 신식민지가 아니었다.

 30여 년이 흘렀다. 박 전 대통령이 이룩한 성과를 아직도 부인하거나 깎아내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상당히 큰 한국(한국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을 아프리카 수준의 가난한 나라에서 불과 두 세대 만에 위대한 세계적인 무역·산업국가로 탈바꿈시킨 것은 놀라운 업적이다. 근·현대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박 전 대통령에게는 참조할 만한 선례가 없었다. 그는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의 요소들을 창의적으로 융합했다. 물론 그의 방식은 강압적이었다. 우리는 전태일 같은 저항의 순교자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 또한 오늘의 한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좀 거리를 두고 입체적으로, 역사학적으로 그리고 비교의 방법을 사용해 한국이 걸어온 길을 살필 여유가 생겼다. 박 전 대통령은 오늘날 모든 한국인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편안함을 가능하게 한 체제를 건설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최초로 말이다.

 누군가의 공로를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그 누구보다 박 전 대통령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거나 그에게 잘못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그는 국민을 파괴했지만 전혀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에이단 포스터-카터 영국 리즈대 명예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