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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씨, 토지문화관서 최열씨와 '환경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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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생태.환경운동의 터전 토지문화관의 이사장인 작가 박경리(朴景利.77)씨는 새만금 갯벌에서부터 서울까지 3백5㎞의 길을 삼보일배(三步一拜) 수행 중인 문규현 신부.수경 스님.김경일 원불교 교무.이희운 목사 등 성직자의 사연을 듣고 밤새 울었다.

아스팔트 뙤약볕 아래 만신창이가 되어도 탐욕과 폭력,어리석음으로 다른 생명을 해친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빌고 받겠다는 고행의 모습을 화면을 통해 봤기 때문이다.


“삼보일배가 무사히 끝나고 새만금이 살아남기를 기원한다”는 격려편지

그는 '이 뭇 생명들을 위해 우리가 어찌하면 좋겠소'라며 환경운동을 이끌고 있는 최열(崔.54)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를 16일 오후 토지문화관으로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2월 7일 채택된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한 원주 선언'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국가가 지켜야 할 국토를 앞장서서 파괴하는 어리석은 시대는 이제 끝나야 합니다. 그것만이 국가와 사회를 구하는 길이며, 새만금 지역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는 길입니다."

이는 전북의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가 바다와 만나 펼쳐놓은 한국 최대의 갯벌과 바다를 막아 농지와 담수호를 만들겠다는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해 문화.종교.환경.정치 분야 인사 2백여명이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모여 밤새워 논의한 결과물로 나온 것이다. 박경리.최열씨 두 사람의 얘기를 옮긴다.

박경리=삼보일배를 TV에서 보면서 직접 가보고 싶었어요. 가서 그분들의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습니다. 너무 늙어 그것마저 할 수 없고 눈물만 나고 정신만 아득해져요. 오늘 최대표와 만나 새만금 갯벌과 생태.환경에 대해 후련하게 이야기를 나누려 아침에는 죽도 좀 먹고 우황청심환도 먹고 기운을 차려놨어요.

최열=그것을 보며 우리 집사람도 많이 울더군요. 1976년부터 환경운동을 시작한 저로서도 새만금 갯벌을 죽이는 것을 막지 못하면 앞으로 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자괴감도 들고요. 그분들이 서울 광화문에 도착할 때까지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저희들도 계속 해나가겠습니다.

박=인간이 없어도 다른 생명체들은 다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생명들이 없으면 살 수 없어요. 우리 없으면 낙원처럼 살아갈 그들에게 지구에서 우리는 가장 몹쓸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온 몸으로 참회하고 있는 성직자들의 삼보일배는 결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쇼가 아닙니다. 그분들을 보며 성직자의 현실참여와 종교가 있는 이유를 다시 깨닫게 됐습니다.

최=이곳에서 '원주 선언'을 채택한 이후 곧바로 서울에서 '새만금 생명의 소리'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대구지하철 참사와 이라크 전쟁이 터졌어요. 인간이 인간에게 끼친 피해에 대한 참회와 속죄, 그리고 깨달음도 삼보일배는 담고 있습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는 위정자들에게 우리 환경.시민단체들도 지난달 28일 참여정부의 환경정책 부재를 성토하는 1천인 선언을 내기도 했습니다.

박=새만금 살리기는 바로 인간 생존의 문제입니다. 편히 살려는 우리의 욕심을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멸망시킨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지구.우주는 생존의 원금입니다.

그 원금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이자, 곧 음식물들과 물건들만 먹고 쓰고 살아야지 간척사업이다 개발이다 하면서 산을 파내고, 바다를 가로막는 등 지구 자체, 즉 원금을 파먹고 산다면 어찌 되겠어요. 마땅히 다른 생명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며 또 그러한 생태계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최=나라를 불문하고 예전에는 좁은 땅 넓히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넓은 갯벌을 가진 독일도 히틀러 시대에 간척사업을 계획했었으나 포기한 지 오래됐습니다. 육지가 해수면보다 낮아 생존을 위해 간척사업을 많이 펼쳤던 네덜란드조차 60년대 이후 모든 간척을 포기했습니다. 간척보다 갯벌을 보전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죠.

전세계에 논은 많지만 갯벌은 적습니다. 희소성이나 경제적 가치로 따져도 논은 쇳덩어리요 갯벌은 금덩어리입니다. 6조원, 아니 그 이상의 돈을 더 들여 금덩어리를 쇳덩어리로 만드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합니다.

박=우리가 쌀만 먹고 삽니까. 갯벌에서도 수많은 먹을 것이 나지 않습니까. 인간도 먹이고 새들도 먹이고 또 갯벌의 것들 서로서로를 먹이며 가만 놔둬도 저들이 알아서 잘 살지 않습니까. 그곳이 대규모 논으로 바뀐다면 갯벌의 자정 기능이 없어지고, 또 농약 때문에 호수와 바다는 얼마나 오염되겠어요.

최=벌써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어요. 호주에서 열흘 가량 날아온 철새들이 새만금 갯벌에서 영양을 보충해 다시 시베리아로 갑니다. 철새들의 세계적인 중간 보급로인 새만금이 막혀 제 역할을 못하니 다시 호주로 돌아가는 철새가 부쩍 줄었나봐요. 호주 사람으로부터 "당신네들이 환경을 보전하지 못해 철새가 못 날아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굴 쳐들 수 없이 창피했습니다.

박=탐욕에 의한 과소비가 문제예요. 에이즈.광우병.사스 등 괴상한 질병들도 다 탐욕에서 나온 겁니다. 좀더 편하려고, 내세우려고 너무 많은 것을 원하고, 쓰다 버린 쓰레기들로 지구가 앓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뻔히 알면서도 그걸 되레 조장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체제에 가속도가 붙는다면 지구는 거덜나거나 깨질 거예요. 지구의 생명을 모두 살릴 수 있는 패러다임이 생태적 관점에서 나와야 합니다.

최=쓰레기는 인간이 남긴 탐욕의 흔적이지요. 선생님이 '생태'라고 말씀하는데 그 말이 '환경'보다 맞는 것 같습니다. 환경은 인간 중심이고 생태는 인간도 그 한 부분이니까요. 토지문화관이 문학뿐 아니라 계속 생태의 철학적.이론적 터전이 돼주었으면 합니다.

박=자유.평등.평화는 인간을 위한 이념이었는데 이제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는 데에서 새로운 이념이 나와야 합니다. 인간에 필요하니 생태계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관점에서 살려야 한다는 이론과 작품을 젊은 지식인.문화인들이 내놓고 운동도 펼쳐야 합니다.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죄이면서도 생태계 순환의 질서입니다.

화산 폭발이나 태풍 등 인간의 관점에서 재앙이라 하는 것도 땅과 바다를 젊게 하기 위한 자연의 질서입니다. 이런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며 인간도 배워 온세상의 생명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최=장자도 "생명을 중시하면 이익이 가벼워지고 이익을 중시하면 생명이 가벼워진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태적 철학에 바탕을 두고 앞으로의 환경운동은 인간의 환경적 생존권뿐 아니라 생명의 평등에 가치를 두자고 널리 퍼뜨리겠습니다.

박=모든 생명은 편하게 지내려 이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능동적으로 살러 나왔습니다.

사람들도 좀 불편을 각오해야 합니다. 불편해야 능동적으로 되고 창조적인 두뇌도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집필한다'고 하지 않고 꼭 '일한다'고 말합니다. 안주하는 것, 능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 그것은 생명이 아니라 물질이며 곧 죽음을 뜻하는 것 아니겠어요.

최=딸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누가 "너도 크면 아버지 같이 환경운동가 될 거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때 "아니오"라고 답하더군요. 왜냐 물으니 아빠는 매일 새벽에 나가 환경운동 하다 밤 늦게 돌아오는데도 환경은 자꾸 나빠지고 있으니 그걸 바로잡기 위해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던 기억이 지금 떠오릅니다. 미국 방문 직전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새만금 문제로 가슴아프다"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박=그래요. 도대체 대통령은 뭐하는 자리냐고 묻고 싶습니다. 가슴만 아파할 게 아니라 명쾌한 판단과 결정이 필요한 자리 아닌가요. 정치적.지역적 계산에 의해 무슨 무슨 개발이다 하며 전국토를 투기장화,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을 빼앗고 인간과 다른 생명의 환경을 파괴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와 미래를 조망.전망하며 하루속히 국토관리에 나서길 바랍니다.

최=새만금 갯벌도 살리면서 전북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방안이 새롭게 모색되어야 합니다. 현재까지 쌓아온 방조제를 잘 활용해 함께 사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느낄수 있는 세계적인 갯벌 생태공원을 만든다면 전북 도민들도 자긍심을 가질 것이며, 이제 과거 개발 독재와 지역 갈등의 시대를 넘어 국민과 생명 화합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기가 될 것입니다.

오후 4시부터 시작된 대화는 오후 7시 지나 어둠이 깔리기까지 계속됐다. 생명에 대해 슬프고 답답한 가슴을 쏟아내려는 듯 박씨가 주로 이야기하고 최씨는 가슴 절절이 받아들였다.

심기만 하면 그 어느 곳보다 잘 자란다며 박씨가 손수 일구고 가꾼 텃밭을 보여주자 최씨는 잘 자란 감자들을 보면서 갯벌이 살아나면 감자 한번 쪄달라 조른다. 원주 산골 토지문화관 평상에서 찐 감자 잔치 한번 푸근히 베풀어지길 바란다.

정리=이경철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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