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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 파일] 웃자란 소년의 서글픈 판타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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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남자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이'라고들 한다. 이건 남자와 살아본 수많은 여자의 목격담이다. 근데 이 '아이'는 진짜 아이일 때도 간단치가 않다. 봉긋한 여자 가슴 하나에도 정신을 못 차리는 10대 초반인 주제에 다 자란 어른 노릇을 하려고 한다. 이건 요즘 영화 얘기다. 먼저 개봉한 '사랑해 말순씨'의 주인공 '광호'가 그랬고, 뒤를 잇는'소년, 천국에 가다'(11일 개봉)의 '네모'(박해일.김관우) 역시 그렇다.

웃자란 두 소년은 살림살이 역시 닮은꼴이다. 광호네는 사우디로 돈 벌러간 아버지를 대신해 화장품 행상인 엄마가 살림을 꾸려가고, 네모네는 감옥에 간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가 시계포를 운영한다. 생계전선을 책임지는 엄마들은 각 소년의 눈에 조금은 측은하고, 조금은 만만하게 그려진다.

이미 개봉된 광호의 얘기는 빼기로 하고 네모에게 집중해 보면, 엄마의 처지를 '미혼모'라고 놀려대면서도 한편으로는 장래희망이 '미혼모 남편'이라고 읊조리는 되바라진 소년이다. 기구한 삶을 견디다 못해 엄마가 먼저 세상을 떠난 뒤, 네모의 측은지심은 자기보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동네에 새로 만화방을 연 '부자'(염정아)에게 향한다.

여기서 두 영화의 길이 갈린다. 광호의 이야기가 병든 엄마를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소년의 쌉싸름한 성장기로 맺어지는 반면, 네모의 이야기는 판타지로 변신한다. 극장에 화재가 나 죽을 뻔한 네모는 저승사자들의 쑥덕공론을 거쳐 수염 무성한 어른의 모습으로 환생한다. 겉모습으로는 네모의 아버지인 양 행세하면서 부자의 남편이 되고 싶은 꿈에 한 걸음 다가선 것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꿈은 아이가 이루기 어려운 영역이다. 할리우드 영화'빅'(1988)에서 어른으로 변신한 소년이 장난감 회사의 자문역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른 대목이다.

영화는 네모의 순진무구하고 맹목적인 사랑 때문에 벌어지는 에피소드로 판타지에 흥을 더해주려고 하지만 그 시도는 기대만큼 흥겹지 않다. 영화도 네모의 한계를 짐작한 듯, 네모의 어른 노릇에 시한부 장치를 도입한다. 남들의 하루가 네모에게는 1년이 되어 급속한 노화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네모는 다시 소년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는데, 그러려면 화재현장에서 구해내려던 다른 아이가 희생된다. 바로 네모가 남편이 되고 싶어하는 부자의 어린아들이다. 결국 네모의 희생적인 선택은 다른 아이의 아버지 노릇을 하려는 꿈의 연장인 셈이다.

공교롭게도 광호와 네모의 시대는 비슷한 80년 전후다. 폭압적인 시대배경은 네모의 경우에 더 중요하다. 옥중의 아버지가 실은 민주투사였고, 고문의 후유증인 듯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설정된다. 이런 아버지를 대신해 스스로 아버지가 되려는 네모의 짐은, 소년이 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게 아닐까. 아무리 판타지로 포장하려 해도, 경쾌한 동화가 되기 어려울 만큼.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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