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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진 기자의 아웃사이더] 다그치지 말고 자녀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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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듣는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람의 말을 듣는데도 무슨 능력이 필요할까 싶겠지만, 특히 부모와 사춘기 자녀의 관계에선 엄청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죠. “요새 왜 그래”“엄마는 뭘 몰라”…무슨 말좀 해볼려고 하면 문을 쾅 닫고 자기 방에 틀어박히는 자녀 때문에 속상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닐겁니다. 아이와 다툼이 벌어질 때마다 ‘괜한 참견’인가 싶어 후회되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고, 걱정과 한숨만 늘어갑니다. 취재를 위해 부모와 학생들을 만날 때 마다 이런 고민에 처한 부모를 많이 만나게 됩니다. 부모들은 아이가 어떤 고민을 하는 지 도통 모르겠다고 하고, 자녀들은 엄마·아빠와는 대화가 안 통한다고 항변합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어떤 고민을 많이 하는지는 여성가족부가 매해 집계하는 ‘전국 청소년 상담내용 현황’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wee센터 등 전국 청소년 상담 기관에서 이뤄진 상담을 주제별로 분류한 것인데, 흥미로운 변화가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청소년들의 가장 큰 고민은 학업·진로가 단연 가장 많습니다. 2013년엔 전체 상담 내용 중 25.36%(총 398만8992건 중 104만7704건)가 학업·진로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부분은 해마다 대인관계·정신 건강과 관련된 상담이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인관계와 관련된 상담은 2007년 13.47%에서 2013년엔 19.56%까지 늘었습니다. 정신 건강 상담은 같은 기간 동안 3.3%에서 9.66%까지 급증합니다. 왕따 등 교우관계에 대한 고민이 그만큼 늘었다는 이야깁니다.

강남통신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청소년들의 고민과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의 고민에 대해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들의 목소를 전달하는데 초점을 뒀습니다.(2013년 5월 22일자 ‘중2병은 없다’, 2014년 1월 29일자 ‘우리 3.5춘기인가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두 한 목소리로 “왕따가 가장 무섭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한 중 2 여학생은 “친구 사이에서 튀지 말고 무난하게, 평범하게 지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한 초등 6학년 여학생은 기자에게 “항상 뒷담화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런 친구들과 친해지던가 아니면 적당히 거리를 둬야 한다”고 인간관계에 대해 조언까지 하더군요. 그리고 공통적으로 “엄마·아빠는 우리들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한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이 겪었던 일입니다. “한 번은 친한 친구한테 온 편지를 엄마가 읽더니 ‘그 친구랑 이제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하는거예요. 편지에 욕이 섞여 있었거든요. 그런데 우리끼리는 욕 하는게 너무 자연스러운, 그냥 대화거든요. 엄마는 저희를 이해하지 못해요. 그 다음부터는 그냥 엄마하고 친구 이야기는 안해요. 해봐야 만나지 말라고만 할테니까.” 아이의 부모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이 욕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에 자기 아이가 걱정이 됐을 겁니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극단적인 처방까지 내렸을 테지요. 하지만 저는 그 부모의 행동이 과연 올바른 대응이었을까 고민이 들었습니다. 욕하는 습관을 고쳐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 방법이 너무 극단적인 것은 아닐까. 결과적으로 그 여학생은 엄마와 대화할 때 친구 이야기는 하지 않게 됐다고 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 대화는 점점 줄고 아이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갑니다.

청소년 상담기관인 서울wee센터에서 근무 중인 전문상담교사들은 “자녀와의 대화에서 부모의 듣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자녀의 행동에 아무리 화가 많이 난다고 해도 우선은 “충분하게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엄마와는 대화가 된다’는 공감대를 먼저 형성해야 한다는 조언입니다. 교사들은 “이때 자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왜 그랬냐”고 다그치기 전에 “그렇냐”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라는 말입니다.

공교육 천국으로 알려진 독일 학교의 사례는 우리에게 ‘듣는 능력’의 중요함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2013년 11월 20일자 해외교육 리포트 독일 편) 독일 학교에선 학생들 사이 다툼이 벌어졌을 때 교사와 학생 둘이 마주 앉아 삼자토론을 벌입니다. 이때 교사는 먼저 두 학생의 이야기를 충분하게 듣습니다. 그리고 학생 각자에게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 대화로 해결할 방법은 없었는지를 이야기하도록 합니다. 교사는 다툼에 대해 누가 옳고 그른지 판결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저 충분하게 듣고, 학생 스스로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합니다. 심지어 다툼을 부모에게 알릴지 말지도 학생 스스로 결정하고 말하도록 합니다.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정현진 기자 correctroa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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