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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 '눈'으로 쓰다] 1. 소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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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딸그락딸그락. 승일이 오른손 약지로 가냘프게 엄마를 부른다. 한때 단단하게 농구공을 움켜쥐던 손가락. 이제는 일부 얼굴 근육을 빼곤 유일하게 움직이는 부분이다. 딸그락 소리가 약해질수록 어머니 가슴은 내려앉는다. '좀 더 잘 울리는 초인종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바람이다. 박종근 기자

2005년 7월 1일, 승일이 드디어 첫 번째 e-메일을 보내왔다. 기자가 그의 가족들에게 근황을 물은 데 대한 답변이었다. 지난해 초만 해도 휠체어에 앉은 채 분주히 매스컴에 출연해 루게릭병의 참담함을 호소하던 그다.

반갑네요

제목소리(루게릭홍보)가첨보다많이작아저겨우몇카페분들만귀기울뿐이었는데

난수표(亂數表) 같은 문장. 이게 정말 최연소 프로농구 코치가 될 정도로 영리했던 그가 보낸 건가. 몸 상태를 알게 되면서 혼란은 더 커졌다. 지난해 늦봄부터 병세가 나빠져 호흡기를 포함해 전신이 마비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일은 어떻게 보낼 수 있었던 걸까. 메일 교환이 거듭되면서 의문이 풀려 갔다. 3년 반 전, 그는 자신이 루게릭병 환자임을 세상에 알리고 이 병의 홍보대사를 자처했다. 하지만 지난해 초 손과 입이 모두 굳어버려 침대에 눕게 됐고, 인터넷 팬카페 활동마저 중단해야 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운명. 그는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적는다.

한동안희망은어디도없어보였다

기적은 갑자기 찾아왔다. 눈동자를 움직여 컴퓨터 화면에 글을 써 보내는 '안구 마우스'로 세상과 소통하게 된 것이다. 이 장비를 쓰는 데 엄청난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메일의 맞춤법을 고칠 여유가 없었다. 그가 '눈'으로 쓴 첫 문장은 짤막했다.

난다시돌아왔다

기적만큼이나 불행도 갑자기 찾아온다. 미국 야구선수 루게릭은 '방망이에 힘이 떨어지면서', 천체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신발 끈을 잘 맬 수 없게 되면서'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승일은 인생의 정점을 앞두고 신호를 받았다. 농구코치를 꿈꾸던 2001년 미국에서 근육 강화 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벤치프레스에누어

가벼운바벨봉을쥐고들어올리는순간

왜이리도무거운지(네 번째 메일에서)

2002년 봄, 현대모비스 농구코치로 발탁돼 귀국했다.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농구 유학을 떠난 그였다. 문경은.이상민.우지원.서장훈 등 잘나가는 동료 틈에서 무명으로 보낸 연세대 시절과 짧았던 프로선수(기아차 농구단) 생활에서 쌓인 한이 이제야 풀리나 싶었다. 외아들의 농구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친 어머니 손복순씨와 아버지 박진권(67)씨도 감격했다. 하지만 봄날은 너무 짧았다. 2002년 6월 4일을 승일은 잊지 못한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이광우 교수의 방. 다리는 이미 얼마 전부터 심하게 후들거리고 있었다. 하루 동안 근조직.혈액.소변.뇌척수액 검사가 이어진 뒤 그의 진료차트에 'ALS'라는 글자가 적혔다.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루게릭병의 의학명이다.

듣도보도못한병… 머리를강타당한듯했다(다섯 번째 메일에서)

그를 코치로 영입한 최희암 당시 현대모비스 감독(현 동국대 감독)은 진단 결과를 처음 전해듣는 순간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그 다음 생각은 "남에게 미움받을 일 없이 살아온 사람인데 어쩌다…"였다. 그날 이후 승일의 인생은 병마가 이끄는 대로 추락했다. 2개월 뒤 장애진단서가 나왔고, 11개월 뒤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탔으며, 20개월 뒤에는 침대에 누워야 했다. 승일은 오전 9시에 일어나 배에 꽂힌 호스로 액체 영양식을 섭취한다(그는 '밥을넣는다'는 표현을 쓴다). 세면하고 잠시 쉬고 난 뒤 컴퓨터를 켜 세상과 만난다. 오후 2시쯤 다시 밥을 집어넣고 스트레칭을 한다. 몸이 굳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나면 TV 시청을 한 뒤 자정쯤 잠을 청한다. 이 모든 하루 일과 중 승일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가 항상 곁에 붙어 수발을 한다.

병마는 승일의 몸을 촛불처럼 태워 들어갔다. 지난해 5월 그의 목에 인공호흡기가 꽂혔다. 호흡기관마저 마비돼 목소리를 잃게 된 것이다. 침묵과 암흑의 세월이 일곱달간 계속됐다. 석고처럼 된 육체 속에서 정신은 오히려 또렷하고 날카로워졌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을 속으로 곱씹어야 했다. 지난해 12월, 드디어 어둠 속의 독백을 마칠 수 있었다. '안구 마우스'를 누나들이 어렵게 구해온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고가(600만원) 수입 장비여서 승일과 다른 근육병 환자, 두 사람만 국내에서 쓰고 있다. 이 장비를 이용해 세상과 소통한다. 중증 루게릭병 환자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꿈을 찾았다.

병을알리자.

이데로삶을포기하기란절대있을수없다…(여섯 번째 메일에서)

승일은 자신이 숨지면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기자에게 밝혀왔다. 오래전 방송에서 장기를 구하지 못해 생사를 다투는 사연을 보고 결심했다고 한다. '어차피흙으로돌아갈육신으로도움을주는건인데당연한일'이라는 것이다. 이를 아버지.어머니에게 차마 직접 밝힐 수 없다고 했다.

가족에게직전하지못함은

제장기이기도하지만부모님이주시기도한장기이기에

함부로말쓰드릴수없었…

이번이기회(보도)로전하고싶네요

얼마 전부터 그는 인터넷 팬카페에서 홍보 활동도 재개했다. 매일 세 시간을 메일을 쓰는 데 보낸다. 이번엔 루게릭병 홍보 말고도 목표가 하나 더 생겼다. 세상과 단절되면서 깨달은 소통과 일상의 소중함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다.

말할수있다는그자체가얼마나큰축복인가를

잃고난지금에야깨닳았고…(스무 번째 메일에서)

그는 최근 팬카페 게시판에 글도 올렸다.

왼손에장애가있더라도

장애로할수없는일보다할수있는일이더많으니

당신은지금행복한사람입니다

문득 루게릭이 1939년 양키스타디움의 은퇴 무대에서 외친 말이 떠올랐다.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복받은 사람입니다."

탐사기획팀=이규연.임미진.민동기.박수련 기자, 박경훈(서강대 신방 4).백년식(광운대 법학 2) 인턴기자

<letter@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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