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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 생업 바빠서 '손주 택배' … 고속버스로 아이들만 귀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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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7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 춘절에는 마오쩌둥 초상 아래 가족들이 모여 앉아 상호비판과 자아비판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77년 문혁 직후의 선전화. [중앙포토]

연인원 28억 명이 이동하는 중국 춘윈(春運·춘절 특별운송) 기간을 맞아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했다. ‘유지얼퉁(郵寄兒童)’으로 불리는 일종의 ‘아동 택배’ 서비스다. 혼자 여행하는 어린이를 출발지 공항에서 도착지 공항까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항공사의 ‘비동반 소아(Unaccompanied Minor)’ 서비스의 중국식 변용이다. 칭다오(靑島) 시정부가 올 춘절을 맞아 부모 없이 손주만 시골 할아버지 댁으로 보낼 수 있도록 산둥(山東)성 내 15개 장거리 고속버스 노선에 도입했다. 생업에 바쁜 부모들은 크게 환영했다. 아이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밀번호를 통해 신원을 확인한 뒤 인계하고 휴게소에서도 기사와 승무원이 보호를 책임진다. 반응이 뜨겁자 안후이(安徽)성 등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고 있다. ‘아동 택배’ 서비스까지 등장한 중국 최대의 명절 춘절의 파란만장한 101년 역사를 살폈다.

1914년 1월 24일 중화민국의 주치링(朱啓鈴) 내무총장이 음력설을 춘절(春節), 단오를 하절(夏節), 추석을 추절(秋節), 동지를 동절(冬節)로 지정해 하루씩 휴일로 삼는 제안을 위안스카이(袁世凱) 총통에게 올렸다. 위안스카이는 민심을 따른다며 흔쾌히 비준했다. 1912년 쑨중산(孫中山)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 사용을 선포하면서 중단됐던 설이 부활했다. 이때부터 양력설 원단(元旦)과 음력설 춘절이 병존하게 됐다.

2010년대 춘절이 되면 중국인 28억 명이 일제히 귀성길에 오른다. 광둥성 펑카이현 이주노동자들이 오토바이에 짐을 싣고 고향을 향해 달리고 있다. [중앙포토]

 음력 정월 풍속의 역사는 농경생활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칭만 시대마다 달랐다. 진(秦)은 상일(上日)·원일(元日)이라 불렀다. 한(漢)대에는 세단(歲旦),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는 세조(歲朝)·원수(元首), 당(唐)·송(宋)대에는 세일(歲日)·신원(新元)이라 했다. 청(淸)대에 원단(元旦)·원일(元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춘절은 국민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서리를 맞았다. 북벌에 성공한 장제스(蔣介石)는 1928년 12월 ‘신력사용 구력폐지안’을 통과시켰다. 국민정부는 이듬해 춘절을 폐지하고 정부기관은 정상 근무를 명령했다. 정월 초이튿날이던 2월 11일 간부회의를 소집한 장제스는 “혁명은 쉽지 않다. 강인한 결심이 없으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며 춘절 폐지 의욕을 불태웠다.

 중국 관료사회의 춘절 선물 풍속은 1930년대 이미 드러났다. 1931년 후난(湖南)성 ‘대공보’에 허젠(何鍵) 성정부 주석의 선물금지령이 게재됐다. “춘절을 폐지했음에도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절약 취지에 위배된다”며 선물수수를 금지시켰다. 1934년 장제스가 ‘신생활운동’을 추진하면서 결혼·장례·생일·연회·선물 풍습을 간소화하는 5대 개혁을 진행했다. 지방마다 위반자 고발과 처벌을 규정한 조례가 반포됐다.

 국민정부는 그러나 춘절을 갈망하는 민의를 끝내 이기지 못했다. 1934년 음력 강제폐지 조치가 중단됐다. “음력 세밑에 공무기관을 제외하고 민간풍속에 간여함은 옳지 않다”는 이유였다.

15일 서울 명동을 찾은 중국 관광객들이 도우미에게 길을 묻고 있다. [뉴시스, 반다오왕]

 중국 공산당은 춘절을 십분 활용해 세력을 키웠다. 1922년 상하이 당조직은 연하장 1만 장을 만들어 노동자에게 배포했다. 시내 도처에 뿌려진 연하장을 본 상하이의 한 시민은 “큰일이다. 공산주의가 상하이에 왔다”고 소리쳤다. 1927년 10월 국민당의 토벌전에 밀려 징강(井岡)산에 쫓겨온 마오쩌둥(毛澤東)은 이듬해 춘절이 다가오자 3일 연휴를 선포했다. 홍군 병사들을 위해 1인당 은원(銀元) 3원과 돼지고기 세 근씩을 배급했다.

 1949년 신중국 성립 후 공식적으로 양력을 사용했으나 춘절을 3일간의 법정 공휴일로 지정하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당시 중국의 물자 공급은 열악했다. 그럼에도 춘절 전후 한 달치 먹거리를 마련하느라 물가 상승은 연례행사처럼 반복됐다. 1951년 베이징이 관례를 깼다. 베이징시 공상국이 국영무역회사와 사영기업을 다그쳐 각지의 춘절 물자를 구매해 공급했다. 설 물가 사범에 대한 단속도 병행했다.

중요아동승객’ 명찰을 목에 건 어린이가 어머니와 인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반다오왕]

 1950년대 중반 춘절 오락은 정치색 가득한 참여형 활동이 주류를 이뤘다. 노동자·농민·군인·일반인이 함께 어울렸다. 관중석에 앉아 관람하는 공연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군중 활동 일색이었다. 1951년 12월부터 공산당은 당내 부패 간부를 상대로 ‘반(反) 탐오(貪汚)·반 낭비·반 관료주의’, 사영기업가에 대해서는 ‘반 뇌물 증여·반 탈세·반 국가재산 절도·반 부실공사·반 국가경제정보 절취’를 취지로 한 ‘3반5반’ 운동을 전개했다.

 1967년 춘절에 혁명적 변화가 시작됐다. 1월 25일 상하이시 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가 ‘춘절에 고향 안 가기’를 제안하는 조반파(造反派·혁명파)의 편지를 게재하면서다. 나흘 후 중앙에서 통지가 내려왔다.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광대한 혁명군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1967년 춘절은 쉬지 않는다”는 요지였다.

 문화대혁명 시기(1966~76년) 중국의 춘절 모습은 ‘김씨 왕조’ 치하의 북한과 비슷했다. 온 가족이 마오쩌둥 초상 아래 소박한 ‘녠예판’(年夜飯·섣달그믐 만찬)을 놓고 주위에 둘러앉는다. 식사 전에 상호비판과 자아비판을 실시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포격’(開<70AE>·호된 비판)도 필수였다. “궁시파차이(恭喜發財·부자 되세요)”란 인사말은 금지됐다. 폭죽·배불(拜佛)·용춤·사자춤·세배가 모두 봉건풍습이라며 금지됐다. 유일하게 춘련(春聯·춘절을 맞아 대문에 붙이는 문구)만 허용됐다. 문구 내용은 혁명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에 한정됐다.

 1979년 1월 17일자 인민일보에 ‘왜 춘절에 쉬지 않나’라는 독자편지가 게재되면서 ‘혁명화’ 춘절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 기사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80년 춘절 휴가가 부활했다.

 1983년 중국 중앙방송(CC-TV)이 설 특집 대형 연예오락 프로그램인 춘완(春晩, 春節聯歡晩會·춘절연환만회의 준말)을 처음 방영했다. 이때부터 섣달그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춘완을 보는 것이 중국인의 설 풍속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춘완에는 한류스타 이민호가 ‘꽃보다 남자’의 주제가를 불러 춘완 인기투표 상위권에 랭크됐다.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의 남순강화 후 개혁·개방이 급물살을 탔다. 경제 상황이 나아지면서 관료사회에 춘절 선물을 빙자한 뇌물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중국 남방주말 보도에 따르면 광둥(廣東)의 쉬펑쥐안(徐鳳娟) 전 쉬원(徐聞)현 당 서기는 낙마 후 1991년 춘절에 3만 위안(약 534만원), 1992년 15만 위안(2668만원), 1993년 20만 위안(3557만원), 1994년 18만 위안(3201만원)을 세뱃돈 명목으로 받았다고 고백했다. 춘절마다 선물 인파가 쇄도해 운전기사가 시간표를 짜줄 정도였다. 1995년 산시(陝西)성 푸청(蒲城)현 서기였던 왕쉬강(王緖剛)은 “100~200여 명의 과장급 간부가 술 두 병, 담배 두 보루만 가져온다고 해도 도합 10만~20만 위안(1778만~3557만원)어치였다”고 털어놨다.

 1999년 아시아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국무원이 ‘전국 명절·기념일 휴가 조치’를 공포했다. 춘절, 5·1, 10·1 기간을 7일에 이르는 ‘황금 주’로 지정해 내수를 진작시켰다. 요우커(遊客·중국인 여행객)가 등장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취임 이후 엄격한 공직윤리를 강제한 ‘8항규정’이 등장하면서 이른바 ‘춘절 부패’가 사그라들었다. 서슬퍼런 단속 칼날에 어떤 공무원도 선물에 손을 벌리지 못하고 있다.

 쑨중산에서 시진핑까지 중국의 춘절 100년을 좌지우지한 주인공은 결국 라오바이싱(老百姓·서민)이었다. ‘신 3반5반 운동’으로 불리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반(反)부패 전쟁 역시 민심이 승패를 결정한다는 의미다.

신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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