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한일회담(52)유진오-청구권위원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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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제1차 한일회담은 청구권 문제를 둘러싼 일본측의 엉뚱한 역제안 때문에 결국 결렬로 치닫고 만다.
청구권위원회의 결렬. 그것은 바로 6개월을 끌어온 1차 회담의 결렬을 의미했다.
청구권 문제야 말로 한일회담의 성패를 결정짓는 관이었고 그로부터 14년 후 청구권 문제의 타결과 함께 한일회담도 종장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청구권위원회의 첫 회담은 52년 2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우리는 회담에서 다음과 같은 8개 항의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요강」을 제시했다.
▲한국으로부터 가져온 고서적·미술품·골동품, 기타 국보·지도원판 및 지금과 지은을 반환할 것.
▲46년 8월 9일 현재 일본 정부의 대조선 총독부 채무를 변제할 것.
▲45년 8월 9일 이후 한국에서 이체 또는 송금된 금액을 반환할 것.
▲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 또는 주사무소가 있는 법인의 재일 재산을 반환할 것.
▲한국법인, 또는 자연인은 일본 및 일본 국민에 대한 일본 국채·공채·일본 은행권· 피징용 한국의 미수금, 기타 청구권을 변제할 것.
▲한국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 소유의 일본 법인주식 또는 기타 증권을 법적으로 인정할 것.
▲전기재산 또는 청구권에서 생긴 과실을 반환 할 것.
▲전기 반환 및 결제는 협정성립 후 즉시 개시하여 늦어도 6개월 이내에 종료할 것.
이상과 같은 한국측 요구의 근거는 분명했다.
45년 12월 6일자 미군정령 33호 32조에 의해 「45년 8월 9일 당시 또는 그 후의 모든 일본국 및 일본인(법인 포함) 재산은 동년 9월 25일자로 미군정청에 귀속」 되었다. 이 재산은 다시 48년 9월 20일에 발효된 한미 재산 및 재정협정에 의해 한국 정부에 이양됐다. 이러한 조치는 샌프란시스코의 대일 평화조약 4조 2항에 의해 「일본은 전기 재산 처분의 효력을 승인하도록」 규정됐던 것이다.
이렇듯 논리정연한 법적 근거와 경위에 의해 우리측은 완전한 소유권을 가진 재산에 대한 당연한 반환 청구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측은 52년 3월 6일 열린 5차 회담에서 「재산 청구권 처리에 관한 일본측 협정 기본 요강」을 제시해 우리측의 청구권에 대한 역청구권을 제기해 왔다.
일본측은 우선 대일 평화조약 4조 2항의 「재한 미군정 및 그 지령에 의해 이뤄진 재한일본 재산처분의 효력을 승인한다.」는 조항은 「국제법상 점령군에게 인정되지 않은 처분까지 승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고 조약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재한 구일본인 재산은 그 처분으로 인하여 발생한 댓가 및 과실에 대해 원권리자인 일본에 청구권이 남아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뿐만아니라 한국이 이미 그 재산을 이양 받아 처분 또는 소유하고 있는 만큼 일본은 당연히 한국에 대해 청구권을 갖고 있다고 강변했다.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일본측의 이러한 적반하장의 자세에 우리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해괴한 논리를 준비하기 위해 일본측은 6개월을 끌어 왔다는 말인가.
아무리 선의로 생각해 봐도 이는 일본측이 회담을 고의로 깨기 위해 들고 나온 책략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었다.
임송본 우리측 대표는 일본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이치에도 닿지 않는 주장을 하는 것은 회담을 파괴하는 태도이며 이로 인해 회담이 결렬되더라도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측에 있다』는 최후 통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청구권위원회 8차 회담이 열린 52년 4월 25일의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일본측이 한일 회담 타결의 관건이 되는 청구권위원회에서 이른바 「재한 일인 재산청구권」을 들고 나온 것은 그들이 진실로 무슨 청구권을 주장하겠다는 의도보다는 우선 회담의 모든 타결은 대일 강화조약의 발효 이후, 즉 일본이 완전한 외교권을 행사하는 이후로 미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일본이 아직 한일 국교 정상화에 임할 기본자세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한일회담이 타결로 가기까지에는 14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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