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영산·영월 신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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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나와 하늘과 하늘 아래 푸른 산뿐이로다.
꽃 한송이 피어 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
밀리고 흐르는 게 밤뿐이오. 흘러도 흘러도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드뇨.』(슬픈 구도)
30년대 순수시 운동에 앞장서 서정적 목가 시인으로서의 우뚝 선 자리를 지켰던 신석정.그도 온 민족이 유린당하던 일제의 핍박하에서는 소박했던 수식어도 사라진 저항의 절규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5대조 때에 분파>
신씨는 단일본이나 5대조에 이르러 영산과 영월의 두파로 나뉘어 오늘에 이르렀다. 78년 인구조사에서 전국에 1만 9천 4백 81가구 10만여명.
시조는 신경.
고려 중엽 중국의 당대 8성(장·홍·엄·곽·경·이·신·지)이 의형제를 맺고 이름을 모두 「경」으로 같이 해 우리나라에 건너왔다는 이른바 「8학사」·「8경공」의 한사람으로 전한다.
신경은 고려 11대 인종 16년(1138년)에 벼슬에 나서 김자광록대부문하시랑평장사의 관직에 올랐는데, 시호는 정의.
신경이 중국에서 건너올 당시 평양 대동강 상에 홍작대를 팔경대라 하고 그 곳에서 지었다는 시가 전한다.
『물이 있고 돌이 없으면 물은 의미 없는 들과 같고, 돌이 있으되 물이 없으면 그 돌의 모양이 기이하지 않는 법인데, 이곳은 물과 돌이 함께 있어 하늘은 조화를 이루고 내 시를 짓노라」(유계무석계환야 유석무계석불기 차지유계겸유석 천위조화아위시).
득성에 있어서 시조이전의 문헌과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없지만 다만 중국용서성 사람으로 통일신라조의 경덕왕시대(682∼704년)에 당현종이 파악사로 신시랑과 엄시랑을 신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신시랑과 시조 신경의 관계는 미상이다.
신경은 자신이 살던 중국 강서성 대수현에 있는 천축산과 산세가 비슷한 지금의 창령 영취산에 이르러 터를 잡았다.
6대조 신백련이 원영산현장마리에 있는 마고지변에서 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읊은 시 『수장백련조심경괘재취산제일봉 영팔허제상야백 산광수색유무중』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영산·영월 신씨는 려말 홍건적의난 때 신부·신순의 충신을 배출한다.

<왜구 무찌른 신유정>
또한 문신으로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개척자 중 한사람인 신천이 빼어났다. 신천은 안향의
문인으로 사상 최초의 서원을 세웠으며 동국공맹의 학자 17인중의 하나다. 수군절도사를 지낸 신식, 병마절제사 신열 등도 돋보이는 이름.
문무에 출중한 인재를 수 없이 배출한 「영·영 신」씨에는 려말 풍운의 정치 승려 신돈을 낳는다. 그는 공민왕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정치·종교의 대권을 장악했다. 1366년 전민변정도감을 설치, 자신이 판사에 취임해 문란한 토지제도를 개혁, 농민의 권익옹호와 국가재정의 충실을 꾀했다. 그러나 끝내 권력 남용으로 인망을 잃고 역사에 부정적 인물로 기록됐다.
조선조에 들어 신씨 인물로는 태종 때 지중추부사를 지낸 신균과 정용호군으로 25차례나 왜구와 싸운 무장 신유정이 이름을 드러냈다. 유정은 태종 3년(1403년)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의주도병마사, 평안도도안무사를 지냈다.

<신인손은 명사관>
학문을 좋아했던 세종 임금이 왕위에 오르자 신석조가 집현전 학사에 등용됐다. 그는 학문과 문장에 능해 『세종실록』 『경국대전』 『의방류취』 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같은 시대의 신인손은 사관으로 여러 대군들과 서사를 강론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형조판서·예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신영희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남효온·홍유손 등과 죽림의 벗이되어 학문에 정진, 문명을 크게 떨쳤다.
이밖에도 조선조에 문신으로 활약한 「영·영 신씨」는 명종 때의 신륜·신응시, 선조 때의 신경진, 광해군 때의 신광업·신경연 등이 있고, 신계영은 외교관으로 뛰어난 솜씨를 보여 1624년 임란 때 포로로 일본에 붙잡혀간 1백 46명의 동포를 데려오기도 했다. 그는 1639년 볼모로 잡혀갔던 세자를 맞으러 심양에 갔으며 효종 3년(1652년)에는 사은부사로 청국에 갔다 오기도 했다.

<항일 결사대 조직>
「영·영 신씨」의 애국충절은 일제 하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돼 신일용·신태악·신공제·신영낙 등의 애국 지사를 배출해 냈다. 신태악은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신공제는 3·1운동 당시 경남 창령에서 결사대를 조직,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에도 「영·영 신씨」는 각계에서 인재를 배출했다.
정계에서는 제헌국회 의원을 지낸 신상학, 2대의원을 지낸 신용훈(경남 창령)·신석빈(전북 정읍), 4·5·6대 의원을 지낸 신영주가 있으며 신도환 전 신민당 의원은 야당의 중진이었다. 현역의원으로는 민한당 부총재 신상우가 그 맥을 잇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서울지검제1차장 검사 신건, 신광옥(서울지검 검사), 신교준(서울가정법원부장판사), 신성국(대구지법 판사) 등이 활약중이고 신봉주·신영무·신주근·신형조·신호양·신기하 등이 변호사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롯데그룹 회장 신격호는 재계의 거물. 마산 크리스탈호텔 사장 신석봉도 신씨 기업인이다.
학계에선 신용태(계명대)·신홍기(한양대)·신무기(동아대)·신민효(해양대) 교수 등이 있다.
언론계에서는 신건식(부산 MBC편성국장)이 활약 중.
▲다음 주는 「충주 박씨」
(글 이춘성 기자 사진 김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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